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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역사][고대의 중국역사][춘추전국시대의 국가][진한제국 분석]춘추전국시대와 진․한제국(사학과레포트)

대왕잉어르 2021. 1. 20. 12:43

춘추전국시대와 진한제국

목차

1. 춘추전국시대와 진한제국(들어가는 말)

2. 춘추전국시대와 진한제국에 대해서

 

춘추전국시대의 변화

1) 문자의 확산

2) 병법의 변화

3) 농업 발달

4) 제철업과 상업

 

제자백가

1) 통치 철학을 겨냥한 유가 사상

2) 평등주의 묵가 사상

3) 난세의 사상, 도가

4) 권력 지향의 법가 사상

 

()의 통일 정책

1) 군사력- 군공에 대한 포상 및 이민족 수용

2) 법가에 의한 통일

 

한무제의 정책

1) 연호와 역법

2) 유교의 국교화

3) 진한 제국의 억상정책-산민전 징수와 염철 전매제도

 

한 무제의 대 흉노 전쟁

호족 성장

비단길

 

3. 참고문헌

 

 


1. 춘추전국시대와 진한제국(들어가는 말)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분열과 전란을 끝내고 진․한 제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로 통합되었다. 이 시기의 특징에 대해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은 황제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또는 중국 전통 문화의 확립이다. 최초로 통일을 완수한 진나라는 통일 제국으로서의 역사는 짧았다. 그러나 이후 중국 역사는 청나라 때 만주가 포함되기 전까지는 기본적으로 이때 만들어진 영역에서 전개되었다. 한나라는 한족․한자라는 말로 상징되듯이 중국의 문화 전통이 확립된 때이다. 
한편 이 때 만들어진 통치 제도나 외교 정책은 안으로는 이후 중국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점과 밖으로는 특히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국제 질서 성립에 끼친 영향력이라는 측면을 함께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주제에서는 춘추전국에서 진․한 제국까지의 역사에서 각 시대마다 나타난 혹은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사실들을 살펴보았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무너진 뒤 일어난 변화와 함께 제자백가 사상이 당시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서술하였고, 진․한 제국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중화주의, 중화제국의 성립이라는 주제가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사실들을 선택하여 서술하였다. 예를 들면 춘추전국 시대의 유가 사상은 주나라의 종법․예악을 되살려 내었고, 한 대의 유학자들은 이를 국교로 만들어간 것이다. 


2. 춘추전국시대와 진한제국에 대해서

춘추전국시대의 변화
1) 문자의 확산 
상․주시대에 갑골문은 통치 군주의 입장에서, 왕도(王都)에서만, 그리고 점복이라는 목적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문자 또한 극히 제한적이었고 청동기에 문자를 주조하는 기술도 왕도만 보유하였기 때문에 서주시대까지는 제후국에서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춘추시대 이후 각 제후국이 독자적으로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특히 전국시대 이후에는 행정문자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새로운 중앙집권적 군주지배체제가 확립되면서 '편호제민․군현․관료․법치'와 같은 지배 체제가 형성되어 나갔는데, 이를 뒷받침한 것이 바로 한자를 중심으로 한 문서행정이었다.

2) 병법의 변화 
춘추시대의 전투는 중원의 넓은 평원에 걸맞은 전차전 위주였다. 그러나 전쟁의 규모가 수십만에서 백만에 이르게 되고, 성을 공격하여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전차전의 한계는 바로 드러났다. 춘추 후기의 주요 전장은 중원에서 서북 산림의 계곡지대와 동남의 하천지대로 바뀌었다. 따라서 보병이 독립하여 전투에 임하는 병종으로
줄지어 서있는 진시황의 병마용. 보병이 중심이다.
 자리 잡았고, 아울러 전투의 주력군이 되었다. 보병을 가장 먼저 창설한 나라는 진(晉)이었다. 
기병은 전국 시대에 중원과 서북지구에서 출현했는데, 처음으로 기병을 응용한 사람은 조(趙)나라의 무령왕이었다. 기동성이 강한 기병은 전투에서 정찰, 기습, 추격, 우회 등과 같은 작전 임무를 담당하면서 이내 독립 병종이 되었다. 한편 물길이 그물처럼 펼쳐져 있는 오, 초, 월은 춘추 후기에 수군을 창설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각각 독립된 성들을 성벽으로 연결한 장성이 출현했다. 
전차전에서 보병전으로 변화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지휘관에 대한 수요가 생겼다. 예전에 혈연적 특권에 의해 지휘권을 가졌던 전차 귀족들은 더 이상 인정받지 못했다. 그 대신 병법에 정통한 전문 지휘관이 발탁되었다. 그리고 병법은 학습을 통해 배울 수 있다고 믿었으며, 병법에 관한 저술이 유포되었다.
수십만에 달하는 대병력에 군량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전 영토에 걸쳐 새로운 수취 방식을 발전시켜야했다. 이제 관리들은 직접 농민들을 상대로 조세를 받고, 농민들을 편제하여 군대에 충원시켰다. 기원전 548년 초나라 왕은 왕국 전체의 토지를 조사하여 관세할 수 있었다. 기원전 543-539년에 정(鄭)의 군주는 관개수로망을 건설하고, 군사로 징집하기 위해서 농민들을 5호(戶) 단위로 편성했다. 

TIP. 호복기사(胡服騎射)
조나라 무령왕은 중원 지역 각 나라가 상호 공방을 지속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기원전 307년 중산국(하북성)과 동호, 흉노, 임호, 누번 등 당시 유목 민족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시 중원지역에서 사용되는 전차가 북방 산악지대나 구릉에서 전혀 무용지물이며, 호인(胡人)들처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방법이 대단히 유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봉건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 개혁을 실시하여, 군사들에게 호인들처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법을 훈련시키는 한편 호인들의 복식을 따르게 하여 호복의 일종인 습(褶, 겹옷)을 입고 아래에는 바지를 입도록 했다. 또한 허리는 가죽띠로 동여매고 고리로 연결했으며, 가죽 신발을 신도록 했다. 그 결과 조나라는 더욱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여 연나라와 더불어 북방의 중심국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3) 농업 발달
철제 농기구가 일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소를 이용해 철제 쟁기를 끌게 함으로써 땅을 가는 기술이 개선되어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농경지의 개간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정부는 도강언과 정국거 같은 대대적인 관개수리사업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종래의 농업 생산량에 비해 거의 3-4배의 수확량을 올리게 되었으며 공백지는 농경지로 바뀌었다. 또한 씨족 공동체적 토지 공유의 규제에서 벗어나 토지의 사유화가 촉진되었다.



춘추전국시대의 각국의 화폐
4) 제철업․상업
제철은 이미 춘추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비교적 대규모의 제철 그리고 철기가 농업과 수공업에 널리 이용 된 것은 역시 전국시대 중기와 후기에 들어서다. 상업도 급격히 발달하여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상인들은 이들 도시와 촌락들을 왕래하며 상업 활동을 하였다. 네 바퀴가 달린 큰 수레가 수십 대, 선박을 백 수십 척씩 동원하여 대상을 편성하는 상업 활동도 성행하였다. 종래에 천시하던 상업이었으나 대상인이 등장하면서 지위가 향상되었다. 경제가 발전하자 각 나라에서 생산된 물자가 원거리 무역을 하였다. 무역을 하면서 대상인이 출현하였는데 진의 여불위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제자백가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이론․사상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를 무대로 펼쳐진 제자백가는 철학이라기보다는 정치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백가의 사상은 이후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까지 전파됨으로써 하나의 문화권을 만들게 되었다.

1) 통치 철학을 겨냥한 유가 사상
유(儒)의 본래 뜻은 고대의 '수(須)'와 '격(覡)'에서 나왔으며, 그 뜻 가운데 하나는 '귀족의 교사'이다. 공자는 주나라의 전통 제후국인 노나라 태생이었던 만큼 서주 시절의 전통적 가치와 이념을 되살릴 것을 주장하였다. 서주의 전통적인 가치는 예(禮)로서 종법과 봉건 제도의 정신적 지주였다. 공자는 예에다 인(仁) 사상을 포함시켜 예와 인을 바탕으로 하는 유가의 기본 골격이 생겨났다 
그러나 공자가 지향했던 봉건제의 토대이자 예의 중심인 천자는 사실상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인의 이념에서 파생된 도덕 정치를 봉건제도의 새로운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법(혈연)에 근거한 봉건제도를 '도덕에 근거한 봉건제도'로 대체하려한 것이다. 그러나 덕의 크고 적음에 따라 신분 간의 그리고 나라 간의 위계를 설정하자는 주장을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는 지배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로 맹자와 순자가 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인․의(義)․예․지(智)라는 사단(四端)으로 확장하는 한편, 인의 이념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중점적으로 모색한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性善)의 논리를 이용하여 인을 토대로 한 인정(仁政)'이 가능하다고 보고 이것이 곧 왕도(王道)의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순자는 예의 이념을 계승했다. 그는 악과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성악(性惡)의 논리에서 도덕적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습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교육을 중시했으며, 군주의 임무는 예를 가르치는 교사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유가는 출발점부터가 철저히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발달하고 성숙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통치 철학으로 기능하려는 강력한 욕구를 담고 있었다. 

                                  
2) 평등주의 묵가 사상
묵가 사상은 겸애(兼愛)라는 말로 대표된다. 묵적을 비롯한 묵가 사상의 주창자들은 주로 무기나 공구 제작에 종사한 수공업자 집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유가 사상이 예에 기초한 엄격한 신분질서(가족 중심적 질서)를 주장한 데 비해 훨씬 평민적인 사상을 전개했으며, 이 점에서 유가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묵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사랑이다. 이기적인 사랑을 뜻하는 차별애(差別愛)를 버리고 화해적인 사랑인 겸애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시대에 만연한 수많은 전쟁들은 모두 '자기만의 이익(自利)을 취하기 위한 별애에서 비롯된 것으로, '상호이익(相交利)'를 꾀하는 겸애를 실천하면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를 이룩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계급이 소멸된 평등한 이상 세계를 이루게 될 것이다. 묵가 사상은 전국 시대 중기 간헐적으로 있었던 평화기에 한때 크게 성행했으나 대륙전체가 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말기에 이르러 급속도로 발언권을 잃고 말았다. 
묵가 사상가들은 유가에서 의도적으로 회피한 '이(利)'의 개념을 과감하게 수용함으로써 혈연에 기초한 봉건 관계를 쉽게 부정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들은 봉건 질서의 군주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백성들에게 헌신하는 군주상을 제시했으며, 군주의 세습마저 부인하고 선양의 옛 관습을 칭송했다. 

[사료] 청동기 문양을 통해 알아보는 의례와 전쟁의 관계
󰡔논어󰡕 어디에서건 공자는 활쏘기와 음주가 의례에서 중요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의례의 목적이 무엇인지, 혹은 어떤 형태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 다행히 전국시대의 의례 행위를 묘사한 많은 청동기가 남아있다. 공자 시대에 대부들은 청동기에 자신들의 승리를 기록하였다. 청동기에 새겨진 의례가 공자가 말한 의례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례가 행해졌는지 알려 주는 자료이다.
두 그림은 모두 기원전 500년경에 제작된 청동기 그림이다. 왼쪽의 그림에서는 윗부분에 술을 마시는 장면, 아랫부분에 전쟁 장면이 있다. 가운데 부분에 긴 창을 수평으로 들고 있는 인물이 지휘관이 듯하며 팔에는 적의 머리가 매달려 있다. 오른쪽의 3단으로 구성된 그림에서 맨 위 단은 활쏘기 연습과 뽕잎을 따는 장면이 있고, 가운데 단은 활과 화살로 오리를 사냥하는 장면과 편종․편경으로 보이는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이, 아래 단에는 성벽을 공략하는 듯한 그림과 해전장면이 펼쳐져 있다.


3) 난세의 사상, 도가
도가 사상은 제자백가 사상들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냄새가 강하다. 창시한 사람은 노자(老子)라고 하나, 실제 도가 사상이 발달한 것은 장자에 의해서였다. 우주 만물은 끊임없이 생성․소멸한다. 이 만물의 생성과 소멸 과정을 관장하는 것이 '도(道)'이다. 따라서 만물의 생성과 소멸은 도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도가 자기 스스로 운동한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도의 작동 원리는 무위(無爲)이며 자연(自然)이다. 
이 논리를 현실 정치사상으로 전환시키면 우주 만물 즉 국가나 사회, 인간 등은 모두 도의 원리에 따라 생성․운동․소멸하므로 군주는 특정한 목적을 앞세워 신하나 백성들을 닦달하지 말고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에 따른 구체적인 국가 형태로서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 을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제시했다. 
도가의 무위사상은 이후 중국의 사대부 계층에게 유가 학설과 상호 보완되는, 물러나 자신을 지킨다는 철학을 제공하여 중국 지식인 특유의 문화를 형성했다. 

4) 권력 지향의 법가 사상
 법의 개념은 춘추 시대부터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다. 법가는 '술(術)'을 중시하는 파, '세(勢)'를 중시하는 파, 그리고 '법(法)'을 중시하는 파로 나뉘는데 이 세 가지를 전국 시대 말기에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년경-233년)가 종합・완성했다. 사회는 오로지 권력과 지위에 따른 힘 관계의 반영일 뿐이라고 본다. '세치(勢治)'는 군주의 권위를 가리키고, '술치(術治)'는 군주가 신하들을 대하는 것, '법치(法治)'는 군주가 일반 백성들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다. 요컨대 군주는 그 지위상 당연히 권력과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신하와 백성을 지배하는 술과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하와 백성은 오로지 복종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일체의 이상이나 관념을 배제하고 철저히 현실적인 이론을 구축했기 때문에 법가는 다른 사상과는 달리 현실 정치에 깊숙이 파고든다. 진의 부국강병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상앙이 그 좋은 예이다. 결국 법가 사상은 혹독한 군주 독재 정치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군주의 지배를 관철시키기 위해 철저한 우민 정책과 사상 통일로 나아간 것이다. 

진(秦)의 통일 정책
 1) 군사력- 군공에 대한 포상 및 이민족 수용
진시황제의 병마용 군단의 사실적인 모습에서 진의 강력한 군사력의 비밀을 알 수 있다. 첫째, 진은 당시 이민족을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있었다. 몸집이 작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사천성 출신, 코가 높고 얼굴이 넙적한 흉노계 민족, 후두부가 긴 서아시아계의 출신도 볼 수 있다. 이는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접점이기도 했던 진의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한 것이다. 둘째, 전투에 강한 유목민족의 전통을 수용했다. 즉, 소매부가 좁은 것은 유목민족 복장의 특징으로 이를 통해 전투에서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병마용 갱 모든 군사용에는 두꺼운 투구를 쓴 병사가 보이지 않으며 특히 전면에는 평복 차림의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의 군사들이 전투를 할 때에는 투구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뛰어들어 동쪽의 군사들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군사들의 용맹성은 진이 군공에 따라 상을 주고 비록 왕족 출신이더라도 전투에 패할 경우 특권을 박탈했던 개혁 정책에 기반한 것이었다.                        

2) 법가에 의한 통일

서체의 통일
진시황제는 법가를 중심 사상으로 삼아 통일 국가에서 법치를 실행했다. 법치의 기본정신은 같은 척도로 '획일화'된 관리 체제를 운영하는 것이다. 이는 550년 동안 광활한 중국 토지에서 중구난방으로 피어났던 정치 원칙에 대응해서 반드시 취해야할 처방이었다. 진대에 세워진 법치라는 틀의 특징은 황제가 직접 신하와 인민을 이끌고, 중앙 정부에서 직접 모든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것이었다. 광활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획일화'라는 표준이 반드시 필요했다. 먼저 법률(진율, 秦律)과 행정(군현제)의 통일에 이어 도량형 통일이 이루어졌다. 도량형은 물질의 유통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조세제도와도 밀접하게 관련된 부분이었다. 화폐를 통일하여 금융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전국의 수레바퀴를 같은 크기로 통일한 것은 전국 도로의 폭을 같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6국이 각자 통용하던 갖가지 ‘대전(大篆)’이라는 서체를 진전(秦篆) 즉 ‘소전’으로 통일한 것은 당시 정부 문서를 전국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전국 공통의 기준이 마련된 상황에서 이제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화폐․도량형․문자 등을 사용하는 것은 반역 행위에 해당되었다.                            

한무제의 정책 
1) 연호와 역법
한 무제는 즉위하자마자 연호 제정 작업부터 시행하여 '기원을 만든다"는 뜻인 건원(建元)을 연호로 정하였다. 그 전까지는 각 제후국들마다 나름대로 해를 셈했으므로 혼란이 많았다. 따라서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된 이상 공동의 연호를 쓰는 것은 당연했다. 나중에 주변국들을 차례차례 복속시키면서 중국의 연호를 쓰도록 했다. 연호는 단일한 중국 문화권에 대한 상징이었으며, 다른 문화권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중화적 자부심의 발로였다. 
연호가 통일되고 나니 자연히 역법(曆法)도 통일 될 수밖에 없었다. 무제는 태음력과 태양력을 합쳐 태초력(太初曆)을 만들었다. 원래 역법은 농경사회에서 필수적인 것이므로 어느 나라에나 있었지만, 무제는 역법 또한 연호와 같이 주변 복속국들에게 중국의 것을 쓰도록 했다. 무제 이후로 역대 황제는 매년 달력을 만들어 주변국들에게 하사했다. 중화사상에 따르면 하늘의 뜻을 아는 천자는 중국의 황제 한 명뿐이므로 아무나 함부로 달력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연호와 마찬가지로 역법도 중국 황제의 종주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연호와 역법을 제정하고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승인한 무제 시대부터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이 완성되었다.                                 

2) 유교의 국교화
한 무제는 군현제를 바탕으로 한 법가적 정책을 통해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재건하였으나, 유교를 국교화 하고 유학을 관학화 하면서 유교를 수학한 관료가 국가 통치를 행하는 중국 고유의 정치 시스템의 기초를 확립시켰다. 
유교가 국교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유교 사상이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논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로 한대의 유교는 진 이전의 유가 사상으로부터 변질되어 있었다. 즉, 유가 사상은 군주권 강화, 엄격한 법질서 집행을 강조한 법가 사상을 비롯한 여러 사상을 흡수하여 유교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한의 유교는 진 이전의 유가 사상이 봉건제도를 강조하고 군주의 전제권을 부정하였던 것과는 달리, 황제 지배 질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한 대의 황제 중심 중앙 집권 체제를 뒷받침하였다. 
한 무제 때 유학은 관학의 체제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관학으로 중앙에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오경(五經,󰡔역경󰡕․󰡔서경󰡕․󰡔시경󰡕․󰡔예기󰡕․󰡔춘추󰡕)의 각 박사를 두었다. 이와 같이 한 대는 중국 교육 제도가 초석을 다진 시기로, 교육 사상․교육 방법․교학 방법이 기본적으로 형성되었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유학이 학술 사상의 주류가 되었고, 이제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유가적 교육을 받아야 함을 의미하였다. 유교가 국교화되면서 유교 윤리인 효․정절 등이 생활 윤리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한 대의 염관과 철관
3) 진․한 제국의 억상정책-산민전 징수와 염철 전매제도
상업 활동을 억제하는 ‘억상(抑商)’은 법가의 주장이었다. 진은 천하를 통일한 다음 ‘중농억말(重農抑末)’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진은 우선 상인을 ‘시적(市籍)’에 등록시켰다. 그런 다음 시장 사람, 즉 상인들을 범죄자나 데릴사위와 함께 구석진 지역으로 옮김으로써 상인 세력이 대두하는 데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서한 초기의 정치가들도 너나없이 중농억상을 외쳤다. 상인에 대한 무제의 공격은 우선 ‘산민전(算緡錢)’ 징수로 시작되었다. 정부는 상인들에게 동산과 부동산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돈으로 환산하여 그 액수를 보고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그 액수의 6%를 납부하게 했다. 만약 허위로 신고하거나 신고를 누락하면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변방에서 1년 동안 군에 복무하는 처벌까지 내렸다.


한대의 염정(鹽井) 화상석
이와 함께 탈세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고민(告緡)’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실상을 조사하여 고발이 사실로 드러나면 중벌로 다스리고, 고발자에게는 고발당한 자의 재산 절반을 상으로 주었다. 그 결과 사회 각계에 고발과 밀고의 풍조가 대대적으로 불어 닥쳤다. 상인들 대부분이 고발당해 반 이상이 파산했다. 상대적으로 국가는 억대에 달하는 돈과 천만 단위에 이르는 노비 및 큰 현에서는 수백 경, 작은 현에서도 100경에 이르는 경작지를 몰수할 수 있었다.  
소금과 철에 대한 국가 전매로 두 필수 재화의 생산과 채굴에 대한 투자를 전액 국유 자금으로 충당하고 민간 자금의 유입을 차단하였다. 이와 함께 궁정․정부․군대 등 국가 기관에 필요한 대량의 용품들을 관에서 직접 제작하여 충당하는 ‘관공(官工)’ 제도도 채택했다. 시장을 거치지 않고 정부가 직접 생산라인을 조절함으로써 ‘부유한 상인과 규모가 큰 중간 업자들을 억제’하는 목적을 실현했다. 무제는 진한의 억상 정책을 체계적인 제도로 정착시켜 후대 억상정책의 기초를 다졌다.     


한 무제의 대 흉노 전쟁
한 무제가 죽은 뒤 ‘무(武)’라는 시호를 얻은 것은 재위 기간 내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흉노를 내쫓은 일과 큰 관련이 있다. 대 흉노전쟁은 먼저 서한의 위세를 대외에 과시하는 일인 동시에 그 쇠퇴의 큰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 무제는 기원전 110년 북쪽 변방의 전선을 한 차례 순시했고, 그날 이후 흉노에 대한 모든 군사행동을 자신이 직접 챙겼다. 병사와 발, 군의 중장비, 진격로 등 모든 것에 간여했고, 개선 후의 논공행상도 직접 주관했다. 대표적인 전쟁에는 대략 10만 기병을 주력으로 하여 증원된 보병과 후방 보급 부대 등 총 50만 명이 넘는 인원이 투입되었다. 이 병력이 사막과 초원 오지로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적군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하여 엄청난 물적 자원이 소모되었다. 
 기원전 99년에 벌어진 전쟁에서 한 군의 사망률은 무려 60~70%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선 기원전 119년의 전쟁에서는 출전한 14만 필의 말 가운데 겨우 3만 필만 되돌아 왔다.  이런 전쟁이 전후로 여덟 차례나 있었다. 최후에는 한 군이 결국 흉노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흉노의 일부는 볼가강 유역까지 옮겨갔고, 또 다른 일부는 남쪽으로 귀순하여 남흉노가 되었다. 바로 이 무렵에 저 유명한 왕소군이 변경을 나서 흉노로 시집가는 이른바 ‘소군출새(昭君出塞)’의 화친이 성립되었지만 전황은 힘겹기 짝이 없었다.



우경과 쟁기-한대 벽돌
호족 성장
동한은 중앙 정부가 관리하던 야철 공매(公賣) 제도를 개방함으로써 철 원료에 대한 관할권이 해당 지방으로 이전되었다. 이때부터 표준 철제 농기구가 일반 농가에 보급되었다. 중농정책은 인구를 빠르게 증가시켰고, 토지의 가치가 높아지자 토지 겸병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땅을 잃고 떠도는 유민이 발생했다. 반면 경제․정치․문화면에서 뚜렷한 우위를 차지한 호족이 각지에서 생겨나기도 했는데, 장원 경제는 호족의 특징이 되었다. 
학술 환경이 보편화 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학술 전수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경제력을 갖춘 소수의 호족에게 한정됨으로써 대를 이어 경학에 종사하는 ‘누세경학(累世經學)’ 현상이 일어났다. 경학은 벼슬길에 오르는 조건이었고, 따라서 ‘누세경학’은 ‘누세공경(累世公卿)’과 연계됨으로써 사족(士族) 세습이라는 큰 특징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족은 ‘문제(門第)’가 되었다. 유가가 제창한, 등급이 있으면서 조화로운 ‘삼대(三代)’의 이상은 그들의 구미와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다. 따라서 유교는 기득권 호족들에 의해 모범으로 떠받들어졌다. 유교에 대한 복응(마음에 새겨 잊지 않음)이 명교(名敎)에 대한 복응으로 바뀌었고, 땅과 재산을 가진 호족이 문화 ‘문벌’로 변신했다. 이렇게 해서 호족은 한 걸음 한 걸음 자신들을 귀족화했다.                                


중국 국경지역에서 발견된 로마 화폐
비단길
서한 정부는 매년 서역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많으면 열 번 이상, 적어도 대여섯 번은 되었다. 그때마다 사절단은 수만 마리의 소와 양, 엄청난 금화와 비단 따위를 가지고 갔다. 이 사신의 길을 따라 중국의 비단이 서역을 거쳐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 전해짐으로써 세계적으로 이름난 진귀한 물품이 되었다. 
안식(安息, 파르티아)․신독(身毒, 인도)․조지(條支, 이라크)․대진(大秦, 로마)의 진기한 보물과 노래․춤․기예․민간 풍속 등도 비단길을 따라 중국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국적 색채가 농후한 ‘호선풍’(胡旋風)이 말 그대로 회오리바람처럼 중국을 사정없이 휘감았다. 
중국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외교는  한 무제 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단길의 중요한 의의는 비단에 있지 않았다. 비단은 상징일 뿐 이 길을 따라 유통된 것은 다름 아닌 최초로 교류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만한 동서문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