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성의 역사 레포트
20세기 성의 역사
20세기 초 빅토리아 시대 고지식한 성 윤리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미국 사회는 성의 억압과 무절제 사이에서 크게 흔들렸다. 성 문화는 현기증 날 정도로 변화를 거듭했고 그 변화의 주인공은 20세기 새 기술인 영화산업과 자동차, 피임약, 인터넷이었다. 20세기 들어 성이 개방되고 사회 전체에 퍼져나갔다. 한 번 열린 판도라의 상자는 되닫을 수 없었다.
20세기가 되자 미국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신생 국가인 미국에서는 보수주의의 빅토리시대 이상과 새로운 나타나는 성문화가 충돌하고 있었다. 두 세대의 가치 충돌은 미국의 모든 세대에 영향을 끼쳤다. 서방 세계가 산업화되면서 이제 여성들도 가정을 떠나 산업 일꾼으로 나섰다. 여자들도 춤추러 다니고 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 여성들도 가정을 벗어나 다양한 인종의 젊은 남성들과 여가를 즐겼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눈에 가장 위협이 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은 바로 자전거였다.
여자들이 자전거를 탄다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고 자전거 때문에 결혼생활이 깨질 것이라고들 했다. 일단 여자들이 맛을 들이면 더 이상 남편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 여자들의 드레스가 땅에 닿아서 자전거를 타려면 짧은 옷이 필요했다. 여성들의 스커트는 차츰 짧아졌고 미국의 도시들은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수백 만 명의 이민자들과 시골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시 빈민가로 모여들었다.
영화 산업을 비롯해 20세기부터 시작된 기술 혁명의 가장 큰 수혜자들은 도시민들이었다. 영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백 화면을 통해서 섹스와 로멘스가 온 세상에 공개되었다. 영화와 함께 나온 것이 키쓰였다. 중년 부부가 키쓰하면서 얘기하고 또 키쓰하고 이런 모습이 광고로 나왔는데 예전에는 생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돈을 내고 영화의 키쓰 장면을 본 다음에 집에서 와서 자기도 한 번 해보면서 “아, 이게 바로 로멘스구나”했다. 1915년에 영화 ‘프리 라이더Free Rider’가 제작되었다. 와이즈 가이가 감독하고 윌 하더가 촬영한 이 영화에서 에로틱한 여주인공의 대명사인 재즈 걸이 나왔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섹스 참고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 뉴욕 협회 독선의 지도자 앤서니 컴스탁은 의사들이 펴낸 책들은 물론 음란하고도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금지했다. 섹스 망상에 사로잡힌 컴스탁은 국회에서 컴스탁 법이 통과된 1870년대부터 혼자 독단으로 검열을 해왔다. 컴스탁 법에 따라 우편을 통해 음란물을 주고받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컴스탁의 눈에 섹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음란해 보였고 피임에서 낙태에 대한 정보에 이르기까지 섹스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이 음란물이었다. 20세기 초 컴스탁은 음란죄로 36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80만 장의 음란 사진을 없애게 했다. 게다가 9만 8천 건에 이르는 신문기사를 음란하다는 이유로 삭제하게 했다. 이처럼 광란에 가까운 음란물에 대한 검열에 온 미국에서 매춘업을 날로 번창했다.
20세기 초에는 수백 만 명의 독신 남자들이 있었다. 다들 가족들을 집에 둔 채 유럽이나 멕시코에서 이민해 온 뜨내기 노동자들이었다. 바로 이들을 겨냥해서 짧은 기간에 섹스 상대가 돼 주는 매춘 사업이 크게 발전했다.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많은 여성들은 매춘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 매춘 못지않게 사람들은 걱정한 것은 바로 자위행위였다. 자위행위는 부도덕한 음란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롭다고 생각했다. 그때 발행된 성 교육 책은 음란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여러 대안들을 제시했다. 10대 청소년들에게 산에 올라가 성서를 읽으며 어머니의 순수한 사랑을 떠올리거나 얼음 물에 고환을 담그고 있으라고 충고하는 책도 있었다.
그러나 섹스에 대한 관점에 모두 구태의연한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초 위대한 성의 개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헤이블락 엘리스, 크래프트 에빅,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그들입니다. 그 이전과 달리 그들이 쓴 글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섹스를 인간의 본능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도덕과 종교 그리고 가정과 따로 분리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한 신문 기사의 제목 중에 미국의 섹스 시간이라는 게 있었을 정도였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성욕과 유아기의 성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런 것들 모두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했다.
간호사였던 마가렛 생어도 성 계몽 운동을 맨 앞에서 이끈 지도자였다. 생어는 뉴욕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직접 보고는 너무도 놀랐습니다. 딸린 아이들이 12명이나 됐으니 여성으로서 삶은 꿈도 못 꾸웠다. 그래서 생어는 여성들에게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생어가 주창하던 산아제한 주장도 앤서니 컴스탁의 눈에 음란하게 보였다. 컴스탁은 1914년 컴스탁 법 위반으로 생어를 체포했다. 생어는 영국으로 도망갔다가 1916년 미국에 돌아와 미국 최초로 피임 클리닉을 열었다.
그러는 동안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날마다 수 천 명의 젊은이들이 유럽 전선에서 죽어갔다. 1917년 결국 미국도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미국은 혈기넘치는 젊은이들을 아무 준비없이 내보낼 수는 없었다. 미국 정부는 해군 기지 10킬로미터 반경에 있는 모든 유곽의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군부대는 병사들이 성병에 걸릴까봐 늘 걱정이었다. 성병에 걸린 병사들을 참호에 배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처음으로 병사들에게 성 교육을 시작했고 세뇌 교육도 마다하지 않았다. 잠자리를 같이할 만큼 예쁜 여자들은 모두 적과 내통하는 여자들이라고 세뇌했다. 독일군의 총알보다도 성병이 훨씬 더 위험한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군부대는 성병 예방 정책을 적극 쓰는 대신 군인들에게 금욕을 당부했고 그 결과 1차 대전에서 성병에 걸려 죽은 병사가 7백만 명이 이르렀다.
전쟁에서 미군이 얻은 것은 성병만이 아니었다. 사병들은 유럽 여성들과 매춘부들에게 성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 한 미군 병사가 기막힌 말을 남겼다. “우린 처음으로 외국 문화를 경험했고 그들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1919년 전쟁에서 이긴 뒤 전혀 새로운 성에 눈을 뜬 미군 병사들이 고국에 돌아왔다. 마침 그들이 돌아왔을 때 미국 역사에서 성이 가장 자유로웠던 1920년대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사회가 바뀌어 플래버라는 여성이 나타났고 콘돔과 팻팅 파티의 시대가 열렸다.
1차 대전 이후 미군 병사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미국에서는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금주법 때문에 미국 땅에서는 아무도 술을 마실 수 없었다. 사회운동가들은 미국 땅에서 술을 없애려고 했지만 금주법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을 실제로 그리 많지 않았다. 금주법은 청교도 정신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사실은 금주법 때문에 무법 천지에다 성의 혼란 시대를 맞이했다. 한 번 규칙을 어기게 되면 더 많은 규칙을 어기게 되는 법이니까.
1920년대는 재주의 시대였다. 술 밀매점과 밀조된 집, 찰스톤 춤, 팻팅 파티가 크게 유행한 시기였다. 1920년대는 아주 민감한 시대였다. 섹스에다 코카인에다 술에다 자유를 부르짖던 여자들까지. 그때 여자들의 짧은 치마가 나타났고 여자들도 담배를 피고 술도 마셨다. 콘돔 값이 크게 내렸고 피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출산 목적이 아닌 단지 즐기기 위한 섹스를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서방 세계에서 가장 큰 변화였다. 20년대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와 함께 플래버라는 새로운 여성이 나타났다. 섹스에 적극 나서는 여성은 미국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스코핏 재럴드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로멘틱 소설이 유행했고 프로이트의 책도 인기를 끌었다. 주마다 수백 만 명의 젊은이들이 어두운 극장 안에 꼭 붙어 앉아서 루돌프 발렌티노와 클라라 보어가 주연한 영화 ‘섹시한 여자’를 보며 황홀경에 잠겼다. 그때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19년에서 1929년 사이에 결혼하지 않은 미국의 미혼 여성 중에 51%가 처녀가 아니었다. 게이와 레즈비언들도 1920년대 미국의 자유롭고 개방된 시대 분위기를 축복했다.
1920년대 게이 클럽들은 해마다 7-8회 정도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를 골라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할렘에 있는 롱랜드 벨리스나 사보이 볼룸, 미드 타운에 있는 매디슨 스쿼어 가든에서도 게이 파티가 열렸고 2-3천 명에 이르는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여자 옷과 턱시도를 차려 입고 참석했다. 1920년대 성 개방 분위기는 빅토리아 시대 윤리 가치에 반발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피임 방법이 훨씬 더 다양해지고 믿을만해졌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피임 기구가 크게 유행했고 양의 내장이 아닌 라텍스로 만든 콘돔도 나타났다. 의사가 피임약을 조제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생어가 다시 나타나 산아제한 운동을 적극 장려했다. 생어는 비합법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금주법 기간에 생어는 네델란드에서 진과 여성용 피임기구를 밀수입했다. 생어는 진정한 운동가였다. 체포될 위협을 무릅쓰고 전국을 돌며 산아제한을 주창하면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 개인의 행복은 포기하고 산아제한 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생어가 산아제한 이점을 선전하고 다니는 동안 성에 대한 또다른 논란이 일었다. 1921년 미국의 많은 주에서 법으로 영화에 나오는 음란한 화면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헐리우드 제작자들은 우체국장 출신의 윌 헤이즈는 내세웠고 헤이즈는 재빨리 허용되는 장면과 허용되지 않는 장면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다. 이것은 훗날 헤이즈 규약으로 알려졌다. 이 규약에 따르면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심지어 결혼한 부부조차 한 침대에 누워 잘 수 없었다. 영화로만 본다면 그 시대 미국에는 트윈 베드만 있었고 더블 베드는 없었다. 침실에 화장실도 없었고 자연스런 생리현상까지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기가 어디에서 태어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지저분한 비밀이야기였다.
무대에서는 여배우 메이 웨스트가 주연한 브로드 웨이 연극 ‘섹스’가 공연 금지되었으며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소설도 음란 서적으로 분류되어 출판을 못하게 했다. 1929년 10월 24일, 주식 값이 크게 떨어지면서 재즈의 시대라 하던 1920년대 자유롭 시대 분위기도 막을 내렸다. 대공황의 영향으로 앤서니 컴스탁과 윌 헤이즈 그리고 뉴욕 협회가 그토록 원하던 성 충동의 억압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출산율과 결혼율이 크게 떨어졌다. 경기가 자꾸 나빠져서 실업자들이 늘어났고 직장에서 해고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 때문에 30년대 들어 미국에서는 성이 크게 위축되었고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주식 시장의 폭락 이후 많은 미국인들은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사치스런 파티도 모두 사라진 1500년 전 사정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제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대신 검열과 억압이 새로운 힘을 얻고 있었다.
30년대 윌 헤이즈의 도움으로 조셉 프리는 훨씬 엄격한 영화 법을 만들었다. 이 법안에 따라 평균 1.5초에서 4초 정도 되는 모든 키쓰 장면을 삭제했다. 심지어 한 발 더 나아가 소 젖 짜는 장면도 금지했다. 재임 기간 동안 조셉 프리는 영화법에 따라 2만 8천 번이 되는 판결을 내렸다. 심지어 뉴욕 주지사였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영화법을 이용해서 날마다 뉴욕 바에서 하는 많은 스트립 쇼를 단속했다. 윤리와 도덕의 수호자들이 성의 분출구를 차단하는 동안에도 억압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미국 10대들의 호기심이었다. 일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졸업 뒤에도 학교에 남았다. 젊은이들은 넘치는 기를 주체하지 못했고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유지하는 젊은이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10대의 성을 자극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자동차였다. 자동차 뒤 좌석은 젊은 두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자동차는 섹스 마차와 같았고 젊은이에게 매우 중요했다. 자동차 안에서는 서로 가까이 앉을 수도 있었고 둘이 자연스럽게 껴안을 수도 있었다. 그 시절 자동차는 섹스의 부속품 같은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젊은 여성들은 학교 댄스 파티에서, 또 자동차 뒷 좌석에서 전쟁터로 떠나는 남자 친구들과 사랑의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 2차 세계대전은 세계 질서를 바꿔 놓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성 풍속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성병 치료약 페니실린이 소개되었고 빅토리 걸과 킨지 리포터가 사회의 논란거리로 나왔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침공하던 날 이 날은 미국인의 은밀한 관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날이기도 했다. 수백 만 명의 병사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애인을 뒤로 하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별천지로 떠났다. 2차 대전 때 1200만 명이나 되는 미국 병사들이 바다 건너 전쟁터로 갔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나 옆에 없으니 마음도 애틋해지고 혼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성생활을 해결했을까? 결국 여성들이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가정을 뛰쳐나와 공장이나 상점으로 갔고 여성들이 사회 생활을 본격 시작했다. 그 결과 성이 문란해지고 사회도 그런 분위기를 어느 정도 묵인해 주었다. 혼자 남은 여성들에게도 남편과 애인을 기다리는 일과 별개로 또다른 생활이 있었다. 집에 남은 여성들도 성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욕망이 있었지만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을 택했다. 너무 어리고 너무 늙었다고 하는 여자들의 푸념 같은 노랫말이 있을 정도였다. 일하는 여자들은 일터에서 관계를 가졌다.
2차 대전과 함께 빅토리 걸이라는 새로운 여성이 생겨났다. 빅토리 걸은 매춘부가 아니라 애국심에서 이제 막 전쟁터로 떠날 장병들과 하룻밤 성관계를 맺는 젊은 여자를 가리켰다. 그러나 빅토리 걸의 상대는 음탕하기 짝이 없는 늑대였다. 1200만 명의 남자들을 군 기지에 격리해 놓고 하는 꼴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늑대들은 미국의 일반 남자들이었고 성 관계를 강요하는 성의 약탈자였다. 내일 배타고 나가니까 어서 하자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간통으로 비난받기는커녕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빅토리 걸은 군인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성 병의 망령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그때 성병의 위험성을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성병을 예방하자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성 관계를 하면 이름도 모르는 끔찍한 병에 걸릴 수 있으니 아예 성 생활을 포기하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때부터 미국은 군인들에게 드러내 놓고 성 교육을 했다. 병사들의 절제력을 믿었던 1차 대전 때와 달리 2차 대전 때 미국 정부는 미군들의 성 생활에 현실있는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사병들은 한 달에 8개 씩 콘돔을 배급받았다. 그러나 참호나 벙커에 갇혀있던 병사들은 그 콘돔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애인이 보낸 연애편지와 사진을 보며 외로움을 달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 미군 사병들의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잡지 편집장들은 벽에 걸 수 있는 미인 사진들을 제작했다. 막사와 참호벽을 비롯해서 과달카르 섬의 야자나무에도 미인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폭격기에도 미인 사진이 붙어있었다. 사진의 여자들은 전쟁터에서 사병들의 노고를 위로해주는 여신들이었다. 사병들은 가만히 앉아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고향에 가면 이런 예쁜 여자를 만나야지 하는 꿈을 꾸웠죠. 사병들은 루즈벨트가 부르짖었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향에 있는 여자들을 위해 싸웠다.
고향에 두고 온 연인이 그립기는 했지만 사병들은 계속 성 생활을 했다. 2차 대전 때 군 기밀 문서에는 외국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 2년 이상 근무했던 사병들의 80%가 성 생활을 계속 했다고 적혀있다. 1943년 페니실린이 성병의 치료약으로 소개된 뒤 사병들은 자유롭게 성 생활을 즐길 수있었다. 그 결과 2차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유럽에서만 수만 명의 사생아가 태어났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난 뒤 수백 만 명의 미군이 고향에 돌아왔다. 아내와 연인들과 다시 만난 참전 용사들은 행복감에 빠졌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유례없는 베이비 붐이 일었다. 미국의 새로운 세대인 베이비 붐 세대는 핵무기를 앞세운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를 맞이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인들은 과거에는 없던 적색공포에 시달렸고 이는 침실에도 영향을 끼쳤다. 1947년 초 FBI는 동성연애자들을 포함해서 수천 명의 정부 관리들의 성생활을 추적했다. 1950년대 발간된 상원보고서에 실지로 정부 내 동성연애자들의 고용현황에 대한 보고서가 있었다. 공무원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기 위한 속셈으로 만든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첫 번째 행정 명령은 정부 내 모든 민간기업에서 동성애자 사원들을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위험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옷을 벗어야 했다.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라기보다 동성연애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미국 정부의 보수주의 태도는 도시 근교에 사는 중산층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1950년대 미국 남자들은 빅토리아 시대 엄격한 윤리 도덕을 앞세워 여자들을 다시 집안에 들여 앉히려고 했다. 성과 정치에서 매우 위축된 분위기였고 매우 답답한 시기였다. 일부 여성들은 집안에서 가사와 아이 키우는 일을 하는 대신 사회 생활을 선택했다. 이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은 경제와 성에서 매우 자유롭고 윤택했다. 여자들이 경제에서 독립하게 되면서 여성들의 성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도 있고 돈도 있는 여성들은 남자들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됐고 따라서 침실에서 남자들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여자들의 성 관계에 더 적극 나설 수도 있었다. 성 관계를 원한다고 해서 타락한 여성은 아니었으니까. 남자들이 하는 일이라면 여자들도 할 수 있었다.
그때 무명의 곤충학자 알프레드 킨지가 미국 성인 남녀들의 성 생활을 공식 자리에 올려놓았다. 킨지는 원래 말벌의 생활을 연구하던 곤충학자였다. 그러다 1939년 수천 명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성 생활의 비밀을 벗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1948년 킨지 보고서가 나왔다. 킨지는 남성의 90%가 자위행위를 하고 결혼한 남자의 50%가 외도를 한다고 밝혔다. 킨지 보고서는 성생활을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안내서가 아니라 실지로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인들의 성 생활에 대한 통계를 낸 것이다. 미국인들의 실제 모습이자 자화상이었던 킨지 보고서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킨지 보고서는 남자의 69%가 매춘부와 성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다고 했고 37%가 동성애를 통해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하루 아침에 베스트 셀러가 됐고 많은 남자들이 여자친구나 아내에게 선물로 주었다. 책이 들어있는 야한 사진 때문에 거센 비판도 받았다.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그동안 들어보지도 못한 얘기를 거침없이 내뱉었으니 정말 충격이고 부도덕한 일이었다. 게다가 가정파괴로 이르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책이기도 했다.
1953년 킨지의 두 번째 보고서인 ‘여성의 성 행위’가 나왔을 때 비판자들은 훨씬 더 강하게 반발했다. 인터뷰에 응한 5940명의 여성들 중에서 33%가 결혼할 때 이미 처녀가 아니었고 13%는 섹스 상대가 6명 이상이었다. 이미 혼전 성관계를 가진 여성의 69%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여자는 주위 평판에 민감하고 임신을 두려워한다는 믿음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내용이었다. 여성의 성 행위를 자세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충격이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 이렇게 두 부류의 여자가 있다고 믿었다. 어떻게 보면 마리아와 창녀 콤플렉스였는데 플레이보이 잡지가 그런 위선과 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본다.
1953년 킨지 보고서에서 영감을 얻은 휴 헤프너는 플레이 보이 창간호를 발간했다. 플레이 보이의 첫 번째 누드 사진은 그때 무명의 젊은 여배우 마린리 몬로의 것이었다. 아름다운 여성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바로 섹스와 쾌락이었다. 플레이보이가 표방하는 것은 남녀의 우아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었다. 로컨 롤과 엘비스 프레슬리, 영화의 반항아에서 영감을 받은 미국의 10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성에 관해서는 열려있었다. 콘돔과 여성용 피임기구가 대중화되었음에도 혼전 성관계를 맺는 여성 5명 중 1명은 임신을 했다.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걱정은 이제 옛말이 돼 버렸다. 경구 피임약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성에 눈을 떴다.
60년대는 섹스의 즐거움을 부르짖는 자유 연애의 시대였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역사에서 가장 젊은 대통령이 나왔다. 공식으로 성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변화와 격동이 시대 중심에 40년이 넘게 여성들의 진정한 권리를 위해 싸웠던 마가렛 생어가 있었다. 생어는 생화학자인 그레고리 핑크스와 함께 여성용 경구 피임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 핑크스는 애노비드라는 경구 피임약을 개발했다. 처음으로 여성 자신이 임신 시기를 결정할 수 있었고 그 점은 모든 여성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제 경구 피임약 덕분에 여성들도 혼외정사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경구 피임약이 산아제한에 훨씬 더 효과가 있었고 여자들도 자유롭게 성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남자들에게 콘돔을 하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되었다.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미니 스커트가 한창 인기를 끌 무렵 헬렌 걸리 브라운이 나타났다. 1963년 헬렌의 책 ‘섹스와 독신여성’은 나오자 곧 바로 베스트 셀러가 됐고 60년대 독신 여성들의 상 생활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결혼하지 않아도 독신여성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자유롭게 성 관계를 가질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고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 작은 책이 커다란 반향을 불어온 것은 그때까지 아무도 여성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6년 500만 명에 이르는 미국 여성들이 경구피임약을 먹었고 같은 해 윌리엄 마스트스와 버지니아 존스는 ‘성으로서 인간의 존재’라는 책을 펴냈다. 여성의 오르가슴을 소개하고 음핵을 재해석한 이 책은 그때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20세기 초에 나온 섹스 안내서는 음핵이라는 낱말 대신 ‘남성의 기관’이라고 했다. 의사들도 음핵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에 대한 연구는 전혀 없었다. 훗날 마스트스와 존스는 음핵이 여성이 느끼는 오르가슴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플레이보지 지는 1969년까지 마스트스와 존스의 인터뷰 기사에서도 음핵이라는 단어를 전혀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전까지 크리토리스가 그리스 어딘가에 있는 유적지 이름인줄 알았다.
1960년대 미국은 자유의 시대였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여전히 편협한 시각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다. 경찰은 오랫동안 동성애자들은 끈질기게 괴롭혔다. 2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중반까지 뉴욕에서만 동성애 협의로 5만 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1950년대 초 뉴욕에서 경찰이 술집 단속을 나갔다가 실지로 일어난 헤프닝 중에서 웃지 못할 일도 여러 있었다. 단속 나간 경찰이 한 술집에 단골로 드나들던 두 남자가 오페라에 대해 이야기를 엿듣고 게이라고 생각해 잡아들였죠. 정상의 남자들이라면 오페라 이야기를 안 한다는 게 경찰의 생각이었다. 1969년 6월의 어느 날 밤 뉴욕 경찰이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스톤 워 게이 바를 기습했다. 마침 그곳에 있던 단골 손님들은 경찰과 맞서 싸웠고 그 사건은 게이들의 권리 찾기 운동으로 발전했다.
게이들의 권리 찾기 운동은 그때 새로운 길을 찾고 있던 성에 한정된 문제만은 아니었다. 60년대가 천천히 막을 내릴 때 즈음 많은 주에서 간통죄를 폐지했다. 800만 명의 미국 여성들이 경구 피임약을 복용하는 상황에서 70년대가 시작되었다. 자유연애와 레이건의 보수주의 시대 사이에 끼인 미국의 70년대는 섹스에 관한 한 무절제한 시대였다. 더 이상 섹스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들만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를 만져야할지 잘 알았다. 단지 분출하는 것을 넘어서 오르가슴이 중요해졌다. 상대방의 기쁨을 최고로 하고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최고의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1970년대 중반에 디스코와 난잡한 성 생활이 유행이었다. 20세기 성에 대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렉스 컴퍼트 박사의 책 ‘섹스의 즐거움’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미국의 어느 서점에도 이 책을 살 수 있었다. 이제 섹스는 미국 사회의 중심 문화가 되었다. 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면서 음란물에 대한 법안이 사라지자 성인 전용 영화 산업이 크게 발전했고 영화 ‘목 구멍 깊숙이’나 ‘존스 부인의 욕망’은 일상 용어가 돼 버렸다. 젊은이들은 시내 유명한 게이 클럽을 드나들며 아무렇지도 않게 춤추며 술 마시고 마약을 즐기면서 자유롭게 섹스를 즐겼다. 이 시기 사람들은 절제할 줄도 몰랐고 자신에 대해 책임질 줄도 몰랐다. 아무리 성 혁명의 시대였다하지만 도를 넘어선 사람들이 많았다. 1980년대 은밀한 관계에 치명타를 날리는 엄청난 사건이 터진다. 그것은 곧바로 사람들의 성 생활을 바꿔놓았다.
1980년 1월 19일 로날드 레이건은 미국 땅에 새로운 보수주의 물결을 일으키며 대통령이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과 에드윈 미시 법무장관은 포르노와 전쟁을 선포했고 때마침 엄청난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81년 7월, 뉴욕 타임즈에는 41명의 게이들에 나타난 희귀한 암에 대한 기사가 났다. 1982년 이 희귀한 병의 이름을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이라 했다. 1981년 처음 발견된 뒤부터 1985년까지 12,000명의 미국인이 에이즈로 죽었다. 70년대부터 시작된 게이들의 권리 찾기 운동은 새로운 전염병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게이 운동의 지도자들 상당 숫자가 이미 에이즈에 걸려 죽었다. 처음부터 언론은 에이즈의 발병 원인을 동성애자들한테로 돌렸다. 그때 에이즈 관련 기사를 보면 새로운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무작정 게이들을 비판한 기사들이 많았다. 게이뿐만 아니라 마약복용자들과 수만 명에 이르는 아이티와 아프리카의 보통 사람들까지 에이즈의 희생자가 되었다. 1985년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죽자 마침내 에이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록 허드슨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허드슨을 미국 남성의 이상으로 믿고 있던 미국의 보통사람들은 동성애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이 얼마나 무식했는지 새삼 실감했다.
죽음과 같은 에이즈 바이러스 때문에 ‘안전한 섹스’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그 전까지만 해도 콘돔 사용을 꺼리던 사람들은 에이즈가 나온 뒤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차츰 남자들의 행동에도 책임감이 뒤따랐다. 70년대 쾌락을 좇던 사람들도 에이즈 때문에 많이 바뀌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훨씬 더 안전한 사이버 섹스가 나타났다. 미국의 부통령 앨 고어가 최고의 교육도구라고 극찬했던 초고속 인터넷이 사이버 섹스의 밑바탕이 되었다. 인터넷은 성에 대해 굉장히 자유롭다. 인터넷으로 실시간 채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인터넷 업체의 큰 성공이 그 촉매 구실을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구와 맞물렸다. 그리고 차츰 섹스와 욕체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90년대 의학의 발전으로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섹스의 즐거움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남성의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와 함께 이제 노년층 부부도 성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새로운 약 때문에 모두 즐거워했다. 제약회사 간부에게 다이아몬드 모양의 푸른 알약 대신 노란색 알약에 웃는 얼굴을 넣으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비아그라의 목적이었다. 비아그라 덕분에 사람들은 새로운 자유를 얻었다. 비아그라는 경구 피임약 이상으로 사람들의 성 생활에 정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비아그라는 일반인들의 성 생활뿐만 아니라 공식 언어에도 변화를 주었다. 섹스를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지만 공식 자리에서는 특정 낱말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아그라가 나오면서 뉴스 앵커도 발기불능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몇 십 년 전 뉴스 앵커 발기불능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 미국 대통령의 엄청난 섹스 스캔들로 섹스는 온 세계인들의 입 방아에 오르내린다. 온 국민의 대화에 섹스가 나왔고 일반 사람들도 오럴 섹스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기 이야기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다. 예전에 오럴 섹스가는 단어가 뉴욕 타임즈에 실리면 당장 다시 찍어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성에 대한 새로운 표현법이 나왔고 한때 금기사항이었던 것이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그러나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도 수백 만 년 동안 인간의 내면에 깊숙하게 자리한 쾌락과 번식에 대한 욕구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 시대 섹스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된다. 성의 역사는 계속 반복되었고 과거에서 그 모든 뿌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밀한 관계를 통해서 인간은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 섹스가 인간 역사에 끼친 영향을 헤아힐 수 없으며 섹스가 없었다면 인간의 역사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