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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14세기 페스트로 인한 중세 유럽의 변화에 대한 연구

by 9급일벌 2021. 1. 18.

14세기 페스트로 인한 중세 유럽의 변화에 대한 연구

 

. 서론

. 페스트의 발생 및 전파

1. 기원 및 발생

2. 유럽으로의 전파 및 확산

. 급격한 인구 감소에 따른 변화

1. 경제적 변화

2. 사회적 변화

3. 교육의 변화

. 페스트로 인한 인간의식의 변화

1. 페스트가 가져온 의식의 변화

2. 교회에 대한 의식의 변화

3. 도덕의 붕괴

4. 예술의 변화

. 결론

 

. 서론

11세기와 12세기의 중세는 생동감과 역동성이 넘치는 시대였다. 이 시기를 거치며 유럽의 중세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안정감으로 인해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인구의 증가는 도시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것은 상업혁명의 단계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상업혁명으로 인해 장거리 교역의 필요성은 증대되었으며,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중세는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발전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안정과 부의 축적을 가능하게 만들어 나갔고, 이로 인해 유럽사회의 성장은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발전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14세기에 페스트가 유럽 전역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상업발전으로 인한 교역로의 다변화는 동방으로부터 전해진 페스트를 유럽 곳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엄청난 속도로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고, 중세유럽을 혼란의 시대로 바꾸어 놓았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과 절망과 비탄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페스트가 유럽 각지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이로 인해 일어나게 된 사회의 변화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찍이 많은 사가(史家)들은 페스트가 중세 유럽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프랑스 중세 사가인 르누아르(Y. Renouard), “페스트는 중세의 종언과 근대의 시작을 구획하는 사건이었다.”고 주장하며, 특히 인구적 차원에서 그것으로 인한 결과를 주목했다. 호이징가(J. Huizinga)쇠퇴기의 중세만큼 그렇게 죽음에 대한 생각에 더 큰 강조와 감동을 부여한 시대는 달리 없었다.”고 하며, 수많은 죽음에 주목했다. 이러한 주장은 페스트로 인한 높은 사망률과 인구 위기를, 중세 말의 죽음에 관한 주제의 지배와 관련시키며, 페스트의 재난적 성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대중의 무의식적인 집단 심성을 탐구하는 심성사가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자크 르 고프(J. Le Goff), 페스트는 근대의 시작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14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까지 르네상스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빈발한 장기 지속적 협상으로 간주한다. , 르 고프의 제자 쉬폴로(J. Chiffoleau)는 심성사가들이 생각하는 페스트와 인구위기의 의미는, 이전의 경제사가들이 가졌던 의미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나의 죽음(la moret de soi)"이라고 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개인주의를 예고하는, 죽음의 개인주의화의 이념이 페스트 이전에 나타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페스트창궐시기에 나타난 인구위기와 정신적 표상 사이의 복합적이고 미묘한 작용 관계에 의해 더 심화되었다고 본다.

 

페스트의 영향에 대한 역사가들의 다양한 해석을 통해, 역으로, 당시의 유럽 중세 사회에 페스트가 끼친 영향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의 모든 측면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엄청난 작업이 될 것이고, 이것은 능력 밖의 일이다. 여기서는 14세기 발병한 페스트가 유럽사회에 끼친 변화 중에서도 인구 감소와 의식의 변화에 대해 주로 살펴볼 것이다. 페스트의 공포가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몇가지 측면을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간략하게 페스트의 발생과 전파 및 확산에 대해 알아보고, 페스트로 인한 급격한 인구감소에 따른 변화와 페스트유행이 야기한 중세인들의 의식변화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 페스트의 발생 및 전파

 

1. 페스트의 발생

페스트로 인한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어떻게 발생되었는지, 어떻게 어디로 전파되어 나갔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가들이 남긴 페스트에 대한 기록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무시무시한 질병이 동방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기록을 바탕으로 페스트의 기원을 찾고 있는데, 중국 남부 기원설과 중앙아시아 기원설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 남부 기원설은 다음과 같다. 1250년대에 몽고의 군대가 운남성과 미얀마지역을 침공한 뒤 귀환하는 과정에서 페스트가 몽골의 초원지대로 옮겨졌고, 1353~1354년에 중국의 8개 지방에서 전염병이 창궐해서 그 고장 사람들의 삼분의 이 가량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전염병이 페스트라는 것이다. 그리고 1200년경의 중국의 총인구가 123백만 명이었는데, 1393년에는 65백만 명으로 격감했다는 자료를 통해 페스트가 중국에서 발병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중국에서 발병한 페스트가 당시 대상들의 교역로였던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와 중동의 여러국가로 전해졌다고 한다. 반면에 타츠가와 쇼지는 중앙아시아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로 전파된 페스트는, 유목민들의 이주로 인하여 확산되기 시작한다. 사람의 이동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쥐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페스트의 확산은 대상들의 이동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대상들의 이동에는 항상 사람들과 낙타등의 가축이 모여들었고, 이를 위한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쥐와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 모이기 쉬운 환경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대재앙의 씨앗은 흑해 연안의 킵차크 한국까지 이르게 되었다.

 

2. 유럽으로의 전파 및 확산

킵차크 한국으로 전파된 페스트가 유럽으로 전파된 계기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당시 킵차크 한국의 자니벡(Janibeg)이 이끄는 군대는 크림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제노바 상인들의 무역 근거지인 카파(Kaffa)를 정복하기 위해 3년째 포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킵차크 한국의 군대내에서 페스트가 발병했고, 사망자가 속출하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날 수 없었다. 카파는 군대를 막아냈지만, 이것은 페스트라는 대재앙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로 인해 페스트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노바 상인들은 페스트를 피하기 위해 제노바로 향했다. 하지만, 이 때 페스트균을 가지고 있는 쥐와 벼룩 등도 그들과 함께 제노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흑사병은 제노바를 기점으로, 급속한 속도로, 불과 5~6년만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페스트가 퍼져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교역망의 확대로 인해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에 중요시되던 정기항로는 지중해와 북부 유럽의 항구를 잇는 것이었다. 이 항로는 1291년에 지브롤터 해협의 자유로운 항해를 막던 모로코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여기에 13세기 들어 선박구조가 개선되면서, 연중항해가 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겨울에도 대서양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배의 끊임없는 출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새롭게 개발된 이 항로와 선박의 개선은 무역의 발달을 가져왔고 중세의 경제적 발전에도 크게 일조를 하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발전을 가능케 했던 항로와 선박이 페스트를 몰고 다니는 죽음의 수단이 되었다.

1347년에 제노바에 상륙한 페스트는 같은 해에 시칠리아 등지로 확산되어갔다. 점차 서쪽과 북쪽으로 확산되어간 페스트는 13481월에 아비뇽, 동년 4월에 피렌체, 동년 5월에 스페인, 동년 8월에는 영국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페스트의 확산속도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발병한 페스트는 1349년이 되면 북부유럽으로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 해에는 스웨덴, 그리고 심지어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까지 페스트의 위협에 노출되게 되었다. 1350년에 접어들게 되면 독일 북부지방으로까지 퍼져 나가게 되었고, 1351년에 러시아까지 페스트의 악몽으로 신음하게 되었다. 크림반도를 통해 이탈리아로 상륙한 페스트는 커다란 반원을 그리면서 5~6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전 유럽을 휩쓸게 된 것이었다.

 

. 급격한 인구 감소에 따른 변화

 

1. 경제적 변화

페스트는 유럽의 중세 사회를 크게 뒤흔들게 된다. 이것은 인구의 감소라는 측면에서 특히 그러했다. 이것은 중세 유럽의 어느 특정지역이 아닌 전 지역에서 나타난 것이었다.페스트로 인한 인구감소는 수십 년 동안 인구성장을 멈추게 했다. 16세기 초엽이 돼서야 페스트 이전수준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만큼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인구의 감소는 유럽의 중세사회 경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11세기부터 13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유럽은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냈다. 300여년간에 걸쳐 온화한 기후가 지속되었고, 이는 풍성한 수확으로 연결되었으며, 중세인들에게 풍족한 식사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시기에는 커다란 전염병이 창궐하지도 않았고, 교회의 주도로 평화가 정착되면서, 인구는 자연스럽게 늘어갔다. 인구증가는 도시의 발전을 이끌었고, 그것은 11~13세기의 상업발전으로 연결되었다. 이로 인해 유럽사회는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14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의 경제적 성장은 주춤하게 되었다. 14세기 초의 유럽에 냉혹한 겨울이 찾아오게 되었고, 이로 인해 수확량이 이전에 비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또한, 인구의 증가로 인해 경작지가 부족했던 중세인들은 경작할 수 있는 땅이라면 모조리 개간하였다. 이로 인해 산림 자원이 훼손되고 토지의 생산성이 떨어졌으며, 건초를 생산하는 목축지의 면적 역시 줄어들게 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가축의 수마저 줄어들었고, 당시의 주로 이용되던 거름이었던 가축의 분뇨 역시 줄어들면서 토질이 척박해져갔다.이러한 것과 맞물리며 줄어들게 된 수확량은 중세인들을 먹여 살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실제로 1316년의 대기근으로 인해, 적지 않은 지역에서 인구의 약 10%가 사망했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기근이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혔고, 심지어 전염병까지 반복되었다. 결국 흑사병이 도달했을 때, 중세인들은 그것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이미 재앙의 조짐이 보였던 중세 유럽사회경제에 결정타를 남긴 것은 페스트의 창궐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인구의 감소는 결국 노동력의 감소로 직결되었다. 농민들의 수가 급감하면서 당장 영주의 땅을 경작하고 농작물을 수확할 노동력이 크게 감소한 것이다. 노동력의 감소로 인해 임금은 자연스럽게 증가해 나갔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층민들의 생활수준은 이전에 비해 어느 정도 향상되었다. 하지만, 2배에 가까운 임금 상승으로 인해 영주들은 큰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영주들의 부담은 물가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해 점차 가중되었다. 인구가 줄어들면서 수요의 감소로 농산물의 가격이 하락하게 되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농업노동자의 경우 초과노동력이 이전부터 많았던 까닭에 농산물의 수확량은 이전과 크게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공산품의 가격은 엄청나게 치솟았다. 이러한 공산품의 수요는 대부분이 영주들이었다. 페스트로 인한 인구의 감소는 당연히 공산품을 생산하는 숙련공의 감소에도 영향을 주었다.

 

숙련공들의 경우, 농업노동력과는 달리 초과 노동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숙련공이 감소하면서 공산품의 생산량이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수송문제까지 겹치면서 공산품의 가격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장원제도의 변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장원제도는 토지에 속박된 노동력과 상대적으로 높은 곡물가격이라는 상황에서 발전이 가능했다. 하지만 페스트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고, 장원제도가 해체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2. 사회적 변화

페스트의 발생은 사회 분위기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가장 큰 변화는 노동력 발언권의 증대였다. 인구의 감소로 인하여 놀고 있는 경작지와 촌락이 많아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토지가 남게 되었다. 남는 토지는 농민들에게 분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노동력의 감소로 인해 영주들이 경작에 부담을 느낀 것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지역이 타지역에 비해 지대와 부역이 많다고 생각되면 떠나갔다. 떠난 농민들은 더 훌륭한 조건을 찾아 나섰는데, 이들은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어디서나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지대는 내려갔고 부역의 금납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세 노동자들의 고용 조건에 대한 발언권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권리가 부인되면 지체 없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영주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고, 왕으로 하여금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영국에서 시행된 1349년과 1351년의 노동자 규제법을 들 수 있다. 영주들은 이러한 규제를 바탕으로 노동력을 헐값으로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이 법은 농민의 저항이 거세었기 때문에 크게 성공할 수 없었다. 결국 농민의 요구 조건들을 모두 수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부농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계층 분화로까지 이어져 나가게 된다.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농촌과 도시에서 나타났던 크고 작은 봉기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흑사병 이전부터 그 조짐이 있었고, 실제로도 나타났다. 이것은 14세기 후반 더욱 광범위해지고 격렬해졌다. 그 이유는 페스트로 인한 엄청난 인구 감소와 전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임금의 상승과 농작물 가격의 하락 등으로 인해 장원제도가 위협받게 되자, 영주들은 사회변화를 무시하고 그것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이로 인해 농노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다. 임금상승 등의 이유로 인해 경제 능력의 상승을 기대했던 농민들은 그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분노에 휩싸였다. 큰 기대를 했지만 그것을 무너뜨린 분노는 비단 농민들에게만 나타나지 않았다. 도시의 길드 마스터들 역시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수입을 보장할 입법을 추구했는데, 이 법에 따라서 취업에 제한을 두어 생산을 줄이고, 생존한 노동자에 대한 주인의 통제권을 증가시켜 나갔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희망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결국 봉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3. 교육의 변화

페스트의 발병으로 인한 변화는 당대의 교육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중세의 교육계를 주도한 것은 소수의 학자들이었다. 당시의 저명한 학자들의 대부분은 최연장였는데, 이들은 페스트의 위험에 쉽게 노출되어 있었고, 결국 대부분이 사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학자들의 사망으로 인해 라틴어 교육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라틴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식자층 일부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의사소통매체로서의 라틴어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여러 가지 세속적인 말이 공식문서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세속적 언어, 즉 모국어의 사용이 늘어나게 되자 모국어에 대한 교육이 자연스럽게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모국어 문학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라틴어는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까지 라틴어가 가지고 있던 위상은 무너지게 되었다.

중세의 대학 역시 페스트로 인한 변화의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유럽의 30개 대학 가운데 네 개가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라지게 되었다. 페스트가 모든 이유를 다 대변해 줄 수는 없지만,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학의 목적은 지식을 추구하는 인간의 열정의 소산이 아닌, 실용적 목적만을 위한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모자란 성직자와 직원의 자리를 대체하기 위한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135026일 트리니티 홀(Trinity Hall)을 세운 증서에서 베이트먼 주교는 새 대학의 목적이 영국, 특히 이스트앵글리아에서의 성직자의 엄청난 손상을 보상하는 데 있다고 했다. 물론 대학의 근본적인 발생 목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 시기의 대학들이 추구했던 목표는, 페스트 발생으로 인하여, 그 이전 시대보다 실용적이었던 부분이 더 강조되었다고 생각된다.

 

. 페스트로 인한 인간의식의 변화

 

1. 페스트가 가져온 의식의 변화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기, 유럽인들은 죽음을 어디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들도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죽음이 일상화된 현실은, 세상사를 합리적으로 밝히려는 그 어떠한 노력으로도 설명되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유럽인들에게 정신적인 불안감과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이전까지의 중세인들은 불안감을 느낄 때 신을 찾았다. 하지만, 페스트가 신이 내린 분노라고 생각한 그들에게 교회는 더 이상 안식처가 되지 못했고, 신의 대리인이라는 성직자들에게도 자신들과 같은 저주가 내려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교회에 커다란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중세인들의 의식구조에 있어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교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

중세에서의 인간의 정신건강과 윤리를 장악했던 것은 교회였다. 중세인들은 의심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에 심리적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스트로 인한 죽음의 일상화는 인간의 마음 한편에 분쟁의 씨앗을 뿌렸고, 중세의 정신적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았다. 페스트 이후 중세인들은 교회가 자신들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페스트는 하나님의 행위로 간주되었다. 교회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신의 분노를 야기했고 그에 의한 응징으로 페스트가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차별적인 페스트의 공격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과 믿음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사람들이 믿고 의지했던 교회는 이러한 위기에 대해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절대적 신앙으로 의지했고 교회의 역할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신의 분노라는 페스트는 신의 대리인이라는 성직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들에게만이 아니라, 신의 대리인인 교회에게도 내려졌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일반인들의 의문을 자아냈다. 사제에 대한 경외심에 의문이 생겨났던 것이다. 일반인들은 사제들 역시 자신들과 같이 죽고, 먹고, 배설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직수여를 받아서 사제가 되면 초인간적인 면을 얻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직자는 신의 대리자로서 세속의 권력을 지닌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페스트의 발병으로 인해 많은 성직자들이 죽어나가면서 사제의 유약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여기에 페스트 유행기간동안 자신의 교구를 지키지 않고 무시무시한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거나, 교구민들의 영혼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 하는 성직자들의 태도는 초서나 랭런드 등의 비평가들뿐 아니라, 성직자들 내부에서도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성직자들 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다가 죽어 간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심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사제들 중에는,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제적 욕구를 채우려는 이들이 존재했다. 경제사정이 원래 어렵거나, 페스트로 인해 재산을 탕진하여 남은 수입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꾸릴 수 없는 경우,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경우와 같은 이유로 성직자들은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더 많은 급여를 위해 흥정을 벌인다거나, 자신의 교구보다 더 좋은 자리가 생기면 교구와 신도를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성직자들의 역할을 기대했던 일반인들의 실망은 당연한 것이었고, 자연히 교회의 권위도 하락하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훌륭한 성직자들 대다수의 죽음과 수도사 전체의 절반이상이 사라지게 되면서 커다란 짐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대신하기 위해 새로운 수도사들을 뽑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죽은 이들을 대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성직교육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심지어는 문맹자도 있었다. 그리고 기혼자와 나이가 어린 사람 등 수도사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서임되는 경우가 많았다. 영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앞선 성직자들의 질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교회 구성원의 질은 낮아졌고, 중세 정신문화의 도태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성직자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바뀌게 되고, 그 권위는 자연스럽게 하락하게 되었다.

 

교회의 권위가 하락하기는 했지만, 중세인들의 종교적 열정만큼은 크게 성장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신의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더욱 빠져들었다. 교회가 우후죽순으로 건립되었으며, 성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은 줄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들 중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것은, 흑사병 이전에 비해 부유한 사람들의 기부 및 자선행위가 늘어나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기부를 통해서 교회가 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지기를 바랬다. 교회의 권위가 이전보다는 하락했지만, 교회라는 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미, 그들은 교회의 권위가 하락하면서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지위가 교회 권위에 대한 확신과, 안정되고 지속적인 위계의 표현으로 지탱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미미하긴 하겠지만 이러한 부의 재분배를 통해 앞으로 있을 사회적 불만이나 혼란을 피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페스트는 중세 사회의 많은 모습을 변화시켰다. 그 중에서도 페스트로 인한 인간의 의식변화가 가져온 것은 엄청난 것이었다. 중세인들에게 있어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페스트로 인하여 교회의 권위가 점차 쇠퇴하면서 일반인들은 교회에 대한 의문점을 쌓아 나갔다. 결국 이것은 후대의 종교 개혁으로 발전하게 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도덕의 붕괴

교회의 영적 권위 하락은, 사회도덕의 붕괴로까지 이어졌다. 앞의 부분에서 교회의 영적 권위 하락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열정은 성장했다고 했다. 이것은 기존교회에 대한 실망감은 높아졌지만, 일반인들의 종교적 감수성은 높아진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남은 이들이 이에 감사해 더욱 신앙적인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범죄율은 상승했고, 신성모독도 흔해졌으며, 성윤리나 규범은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고 술과 쾌락에 집착했으며, 기존의 관습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것은 페스트 이후, 긴장이 사라지고 과거보다 경제력이 상승하면서 일어난 현상이기도 했지만, 교회의 권위가 하락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했다. 교회 권위의 하락으로 인해 기독교 윤리와 관습이 중세사회를 완벽하게 지배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중세 사회의 도덕성은 붕괴하기에 이르렀다.

 

4. 예술의 변화

예술작품에는 당대의 사회상과 인간의 의식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를 살아갔던 인간의 의식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의 변화는 예술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페스트로 인한 어두운 사회 분위기로 인해 예술에도 어두운 기색이 드리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관통하는 예술작품에서 대다수의 주제를 차지하는 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죽음의 춤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은 벌거벗은 해골들이 춤을 추면서 다양한 신분과 계층의 사람들을 둘러싸고 희롱하는 모습을 주제로 삼는 작품들이다. 이 외에도 사람들을 덮치는 죽음의 광경이 자주 그려졌고, 죽음이 손에 낫을 들고 있는 해골의 모습으로 의인화되기도 했다.

 

어두운 성향의 주제는 종교작품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구원을 뜻하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장면이 공포로 변화했고, 그리스도가 위협과 분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희망을 내보이던 성모 마리아가 우울하고 슬픔에 찬 모습으로 변모했다. 한편, 페스트로부터 보호받으려는 목적의 산물로서의 예술작품이 나타난다. ‘망토를 입은 동정녀 마리아에서는 마리아가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망토를 활짝 피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또한 페스트의 수호성자가 나타나게 되는데, 성 세바스찬(St. Sebastian)과 성 록크(St. Lock)에 대한 숭배를 통해 사람들은 안정을 찾게 되었고, 예술작품에서도 자주 표현되었다.

 

. 결론

중세는 11세기와 12세기를 지나면서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인구의 증가로 인해 도시가 발전하는 등 중세 유럽은 발전은 거듭했다. 발전을 거듭하던 중세 유럽 사회는 14세기 중반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페스트로 인해 변화해 갔다. 동방에서 발생했던 페스트는 크림반도에서 몽고군과 대립하고 있던 제노바 상인들을 통해 유럽대륙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페스트는 확대된 교역망으로 인해 빠른 속도로 유럽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급속도로 확산된 페스트로 인해 유럽의 인구는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인구감소는 많은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먼저 경제적으로 큰 변화가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사망함으로써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줄어 가격이 하락하게 되었다. 반면에 공산품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크게 올랐다. 이것은 영주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장원제도가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다. 페스트의 발생은 사회 분위기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노동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노동력의 발언권이 이전보다 크게 증대된 것이다. 영주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나름의 조처를 취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부농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또한 농촌과 도시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봉기 또한 중요한 사회 변화 중 하나였다. 교육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모국어의 사용이 확대된 것이었다. 라틴어를 사용했던 소수의 학자들이 대부분 사망하게 되었기 때문에 라틴어 교육이 어려워졌던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인간 의식의 변화였다.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기, 사람들은 죽음을 어디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페스트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신의 분노였다. 그들은 신의 분노를 내린 교회에 대해 더 이상 안식을 느끼지 못했고, 성직자들 역시 신의 분노에 의해 희생당하자 교회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었다. 기존 교회에 대한 실망감이 심해졌다고는 하지만, 종교적 열정과 감수성은 높아졌다. 또한 교회가 무너지면 자신들도 무너질 것처럼 생각했던 지배층들은 교회에 대한 기부를 통해 교회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랬다. 한편으로 미미하긴 했지만, 자선행위 등의 부의 재분배를 통해 앞으로 있을 사회적 불만이나 혼란을 피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교회의 영적권위의 하락은 사회도덕의 붕괴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는데, 신의 분노를 피한 사람들이 더욱 신앙적인 삶을 살아갈 것으로 생각했던 기대가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범죄율은 상승했고, 신성모독도 흔해졌으며, 성윤리나 규범은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고 술과 쾌락에 집착했으며, 기존의 관습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인간의식의 변화는 당대의 예술작품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페스트로 인한 어두운 사회분위기로 인해 예술의 주제 역시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페스트는 중세 유럽의 많은 영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한 변화의 물결은 당연한 것이었다. 많은 학자들이 페스트의 창궐을 가리켜 중세의 종언이자 근대의 시작을 구획하는 사건이라고 간주했고, 이때가 돼서야 현대인이 만들어졌다고 강조했던 것이다.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의 여지는 많다. ‘장기적 중세를 옹호론자들은 르네상스나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페스트 역시 중세와 근대를 구획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페스트의 유행은 인구 증가-기근-전염병-인구감소로 이어지는 중세의 일반적인 현상의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페스트는 1347년부터 1352년까지의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최종적으로 18세기까지 이어졌으며, 페스트로 인한 인구 변화나 사회경제적 변화는 지역에 따라 편차가 컸고, 따라서 페스트의 유행 그 자체가 어떤 본질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페스트가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기존의 종교적 관념과 유럽의 경제구조 및 봉건적 질서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 것만은 사실이었다.

 

페스트로 인한 유럽 사회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가장 먼저 주목했던 부분은 의식의 변화라는 점이었다. 중세 유럽사회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변화가 의식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식의 변화 중에서도, 교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봉건질서의 와해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사회가 쇠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증거가 제시되어야 하지만, 여기서 제시된 바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굉장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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