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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세계사][제국주의의 역사]제국주의의 대두에 심층분석

by 9급일벌 2021. 2. 2.

 

제국주의의 대두

목차

 

1. 들어가기

2. 제국주의의 대두

 

(1)2차 산업혁명

 

(2)독점자본주의의 등장

 

(3)후발 주자들의 성장 -미국과 독일

 

(4)유럽의 대불황과 식민지 개척

 

(5)아프리카 탐험

 

(6)사회진화론

 

(7)제국주의의 영토 분할

 

(8)제국주의 침략의 교두보, 수에즈 운하

 

(9)제국의 신경망, 전신 ; 제국주의와 과학

 

(10)남아프리카와 세실 로즈

 

TIP 남아프리카 전쟁(보어전쟁)과 보이 스카우트

[사료] 백인의 짐

[사료] 아프리카인에게 비친 백인

 

 

 

 

1. 들어가기

 

제국주의는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 후 유럽 내에서 국가 간 영토 문제로 다툴만한 꺼리가 사라졌다. 또한 제2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독점자본주의 체제로 경제 체제의 변화가 생겼다. 새로운 기술 개발은 석유나 고무, 철광석 등 많은 공업 원료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자원은 공교롭게도 유럽에서는 그 수요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충분치 않았다. 결국은 자원을 공급해줄 만한 땅을 찾게 되었다. 게다가 1870년대 이후 유럽의 나라들은 외국에서 싼 농산물이 들어와 국내 농업이 타격을 받았고 공장의 과잉 생산으로 커다란 불황의 늪에서 헤매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을 찾아야 되는 상황에서 결국은 유럽의 바깥 세계에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국주의에 의한 세계 분할은 세계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놓고 우선권을 차지하려는 공업 국가들 간의 경쟁이었다. 유럽은 세계의 구석구석을 찾아 나섰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심지어 태평양의 섬들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주의 침략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사회진화론이었다. 서양인들은 식민지 침략을 문명 세계가 야만 세계에 대한 문명화의 사명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포장하였다.

제국주의에 의한 전 세계의 식민지 분할은 20세기 초에 완료되었으나 제국주의의 경쟁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려는 제국주의 간의 갈등은 결국 세계대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2. 제국주의의 대두

 

2차 산업혁명

19세기 후반 석유와 전기를 동력원으로 하는 제2차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화학·철강 공업 등 새로운 산업 분야가 개척되었고, 산업의 발전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강철 제련 기술의 발전으로 강철이 철의 사용을 능가하게 되었다. 기존의 강철 제련법을 개선함으로써 강철 생산에 혁명을 초래했고 철강은 산업용 기계는 물론 레일, 다리, 건축물 등으로 그 적용범위를 확장해갔다. 특히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인기를 독차지한 에펠탑은 철강의 용도가 수직 건물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전기 기술에도 큰 발전이 있었다. 산업혁명이 증기의 시대였다면 제2차 산업혁명은 전기의 시대였다. 상업적으로 활용가능한 발전기변압기전구 등이 발명되었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는 가정에서 전기 조명을 사용하는 시대를 열었고, 육중한 증기기관을 대신할 전기 모터가 발명되어 지하철전차장거리 철도에 활용되었다. 생산을 위한 기계설비를 설치하고 이동하는 것이 수월해짐으로써 생산 조직도 좀 더 유연해 질 수 있었다.

새로운 기술혁명은 각종 자원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불러 일으켰다. 이들 자원 가운데서도 특히 현대 산업에 필요한 철주석아연니켈석탄고무석유 등이 필요하였는데 대부분 유럽에서 거의 생산되지 않거나 생산된다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극소량에 지나지 않았다. 가령 석유나 고무 등은 1875년까지만 하더라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어 가솔린 엔진과 자동 기계가 개량되면서 그 두 가지 자원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유럽에서 거의 산출되지 않는 이상 유럽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심지어 태평양 제도로 그 자원을 찾아 나섰다. 19세기 후반기부터 이들 지역이 유럽과 미국의 침략 대상이 된 것은 단순한 식민지 건설이나 이주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독점자본주의의 등장

19세기 후반기의 새로운 동력원과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서 대규모의 자본 투자와 대규모의 생산 설비를 필요로 했다. 새로운 기술 체계가 요구하는 대규모 생산 설비를 위한 거액의 자금을 자본가 개인이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식회사라는 경영 형태가 보급되었다. 기업 규모는 점점 커지고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압도하고 자본 집중이 진행되었다. 여러 개의 기업이 개별적으로 경쟁하던 체제가 소수의 거대한 기업들이 경쟁하는 체제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강철, 전기, 화학 산업, 석유 산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은 독점자본주의의 등장을 촉진하였다. 더구나 1873년 공황 이후 약 20년간 유럽의 선진 공업국들을 습격했던 대불황은 기업 간 경쟁을 부추겨 독점 형성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하였다.

 

후발 주자들의 성장 -미국과 독일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러 신흥 공업국가들이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하였다. 한때 세계의 공장이었던 영국은 그 자리를 후발 주자들에게 내주어야 했다. 대표적인 신흥공업국은 미국과 독일이었다.

미국은 19세기 전반에야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에 들어왔는데 남북전쟁(1861~1865) 이후 공업 부문에서 1860년 세계 4위에 머물렀던 미국은 1894년에는 1위로 껑충 뛰어 올랐다. 풍부한 자원과 광대한 국내시장을 가진 미국은 서부 개척이 완료되면서 라틴아메리카와 태평양으로 적극적인 대외팽창을 전개했다. 대서양 좌안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는 1898년 에스파냐와의 일전을 통해 완성되었다. 미국은 하바나 항에서의 전함 폭발을 빌미로 에스파냐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고, 자본가들에게 쿠바는 설탕 및 담배의 원료 공급지로서 유망한 자본 투자 대상 지역으로서 그리고 긴요한 군사기지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에스파냐는 이 전쟁에서 패했으며 쿠바, 푸에르토리코에 이어서 괌과 필리핀도 미국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갔다.

독일은 뒤늦게 산업화를 추진하였고 1870년대 후반 이후 대불황과 보호무역정책 하에서 국가 주도의 전형적인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독일 경제는 1870년에서 1914년까지 4배로 급성장했다. 인구도 4100만 명에서 6400만 명으로 급증했다. 19세기 말 영국으로부터 2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빼앗은 독일 성장의 원동력은 중공업과 전기화학 공업이었다. 독일의 철강 생산은 1890~1910년의 20년 동안에 6배 이상 증가하여 세계 철강 생산의 22.7%를 차지하였다. 영국의 철강 생산은 20세기 접어들면서 독일에게 추월당했다. 또 화학 공업도 세계의 기술을 선도했다. 지멘스AEG 2대 독점체가 지배하는 전기 공업은 미국과 세계 시장을 분할했다. 영국의 전기화학 공업은 독일보다 한참 뒤떨어지게 되었고 이것은 영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서는 계기를 만듦으로써 치열한 식민지 경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유럽의 대불황과 식민지 개척

1873년부터 20여 년 동안 유럽은 대불황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남러시아인도의 곡물, 북아메리카와 아르헨티나의 고기 등이 싼 값에 대량으로 유럽에 운반되어 유럽 농업이 대타격을 받고, 2차 산업혁명의 파급으로 공업제품도 과잉생산된 것이 장기 불황의 원인이었다. 영국의 경우 시장 침체, 물가 하락, 낮은 이윤과 배당으로 얼룩진 시기였다. 영국 투자가들은 이익을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해외 투자에 눈을 돌렸다. 외국 주식에 대한 총투자액은 188395백만 파운드에서 1889393백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곧이어 그것은 영국 국민총생산의 8%에 이르렀고 저축의 50%를 흡수했다. 해외투자는 국내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높은 수준의 이익을 약속했다. 영국의 식민지 개척에 앞장섰던 세실 로즈는 나는 어제 런던의 이스트엔드에 가서 실업자 집회에 참가하였다. 그 곳에서 빵을 달라는 연설만 듣고 오다가 문득 제국주의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우리는 영국의 4천 만 국민을 피비린내 나는 내란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과잉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공장이나 광산에서 생산하는 상품을 위해 새로운 판로를 만들어야 한다. 당신들이 내란을 피하려면 당신들은 제국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식민지들은 식민 본국의 자본가들에게 보호받는 투자처였다. 동시에 식민지는 다른 곳의 투자 경로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적 발판이 되었다. 북부 아프리카의 이집트나 남아프리카의 희망봉과 같은 영국의 점령 지역들은 이윤의 원천으로서도 중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로 가는 중간 기지로서도 중요했다. 또한 인도는 동남아시아의 싱가포르나 말레이 지역의 주석과 고무, 중국의 시장, 호주나 뉴질랜드의 영토로 가는 중간 기지였다.

 

 

아프리카 탐험

미지의 세계로 알려져 있던 아프리카 내륙 지역은 탐험가들에 의해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아프리카 탐험 시대를 연 것은 리빙스턴이었다. 그는 184027살의 나이에 의료 선교사 자격을 얻은 다음, 런던선교협회의 일원으로 남아프리카로 떠났다. 선교 활동에 종사하던 리빙스턴은 차츰 토착 주민의 언어와 습관, 혹은 지리상의 발견에 점차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1849년에는 그는 칼라하리 사막을 종단하여 누가미호를 발견했다. 이것은 서양인에 의한 최초의 발견이었기 때문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영국 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그는 잠베지 강 상류에서 대서양 연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탐험하고 관찰기록과 탐험 일정을 정리하여 상세한 조사 보고서와 지도를 작성하였다. 1855년 리빙스턴은 거대한 폭포를 발견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목격한 가장 훌륭한 광경이라 말하고 그 폭포를 빅토리아 폭포라 이름 붙였다. 이로써 아프리카인들이 오래 전부터 모시오아 튀니아’(포효하는 연기)라고 부르던 이름은 사라지고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딴 빅토리아 폭포가 지도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리빙스턴의 탐험은 곧바로 영국에 소개되었으며, 1856년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전 영국인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1856년 일시 귀국했던 그는 2년 뒤, ‘동부 아프리카 및 중앙 아프리카 조사 탐험대대장 자격으로 탐험을 이어나갔다. 마지막 탐험은 1866년에 이뤄졌다. 정부와 왕립 지리학회가 비용을 부담한 이 탐험은 아프리카 남동부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탐험이었다.

 

1840년부터 약 30년 동안 아프리카 중남부 일대를 탐험한 리빙스턴의 탐험기는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런던에서 출판한 자신의 탐험기에, 카탕카 지방에서 수백 파운드에 달하는 기둥 모양의 동괴(銅塊)를 발견했노라고 기록함으로써 영국 산업자본가들의 구미를 자극했다. 리빙스턴은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 연구라는 책자에서 자신의 여행 동기를 나는 방대하고 비옥한 아프리카 대륙이 그 신비의 베일을 벗고 유럽인의 경제 생활에 유용한 상업시장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의 기록이 이 미지의 대륙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리빙스턴이 밝혀낸 아프리카 내륙의 모습은 유럽 각국의 야심을 자극했는데 특히 관심을 보인 사람은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였다. 그는 콩고 지역에 군대와 관리, 많은 탐험가들을 파견한 뒤, 본국 크기의 78배나 되는 콩고를 사유지로 선언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열강은 앞을 다투어 탐험가를 후원하여 아프리카 진출을 서둘렀다. 한편 콩고 지역을 벨기에가 독점하려들자 영국과 프랑스가 반발하면서 1884~1885년에 베를린에서 유럽 각국 대표들이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먼저 점령하여 지배권을 획득한 나라에게 선점의 권리를 부여하기로 공식 결정함에 따라 아프리카 전역은 십여 년 만에 급속히 유럽의 식민지로 재편되었다. 결과적으로 리빙스턴의 탐험은 유럽 각국의 아프리카 분할을 자극한 것이었다.

 

사회진화론

인종 차별 의식은 계몽주의 시기의 유럽인들에게도 존재했다.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논리를 보편화했고 그 진화론을 토대로 사회적 진화론이 자리잡았다.

사회진화론은 사람들 간에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고, 사회들 간에도 진화와 퇴보가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유럽인들의 눈앞에서 아프리카인이 쓰려져 죽고 엘니뇨로 인한 가뭄으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인도인들이 목숨을 잃자 서구인들은 진화론이 인간사회와 함께 다른 인종간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특히 허버트 스펜서의 견해에 의하면 백만장자들과 유럽인들, 특히 사회진화론에서 가장 우수한 종에 해당하는 북반구 백인들의 부유함은 자연선택설로 설명할 수 있었다. “무능한 자들의 가난, 경솔한 자들의 고통, 게으른 자들의 굶주림, 강자들에 의해 밀려난 수많은 약자들이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은 미래의 복지를 위한 법칙이다.”

유럽출신 백인들에 의해 통치되던 라틴아메리카에서 사회진화론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애초 동식물의 범주에서 선택된 종들이 가장 우수한 혈통을 생산한다는 이론인 우생학이 인간에게도 적용되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 형질을 개선할 수 있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국민들의 혈통을 개선하기 위해 멕시코와 브라질 정부는 유럽 백인들의 이주를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제 사회진화론은 19세기 말부터 유럽 사회에서 여러 가지 방향으로 해석되어 제국주의의 정당화, 소수 자본가의 독점, 나치즘 등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제국주의 팽창 이념의 뼈대를 제공한 사회진화론의 논리에 따라 제국주의의 타자인 아프리카 흑인, 호주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야수' 내지는 '열등 인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식민 지배를 유럽인들은 문명화의 사명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제국주의의 영토 분할

1870년대부터 유럽에 의한 식민지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 유럽 열강의 눈에 가장 먼저 띤 곳은 아프리카였다. 1880~90년대 제국주의 분할 경쟁의 중심무대로 된 것은 아프리카였다. 대항해 시대 이래로 아프리카 항로를 처음 알게 되면서 유럽은 아프리카를 노예 공급처로 이용해 왔다. 그러나 해외 식민지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아프리카는 무역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선두를 달리던 영국은 이집트에서부터 케이프타운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식민지를 계획했다. 이에 대항하여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에서 사막을 거쳐 중부 아프리카와 홍해 연안으로 나가려 했다. 독일은 1884~852년 동안 동아프리카서남아프리카 식민지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이탈리아는 에리트리아소말리아를 획득한 뒤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였으나 격퇴당했다(1896). 또한 주변으로 전락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도 옛날 식민지 제국의 유산을 계속 보존하고 있었다. 벨기에는 자원이 풍부한 광대한 콩고를 손에 넣었다. 1876년 아프리카에서 유럽이 지배하는 땅은 10%도 안 됐다. 그러나 1900년에는 아프리카 땅의 90% 이상이 유럽 식민지였다.

아시아에도 열강의 침략은 가속화되었다. 영국은 인도 주변(미얀마, 아프가니스탄)으로 지배를 확장하는 한편, 말레이 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1887년 베트남과 라오스캄보디아를 포괄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만들었다. 또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섬들에도 제국주의 열강의 깃발이 펄럭였다. 1880년대에 독일은 남태평양의 섬들을 손에 넣었다. 영국이 북 보르네오를 영유하고 동부 뉴기니를 독일과 나누자,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섬들을 합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했다. 동남아시아는 물론 태평양과 인도양의 작은 섬들조차 제국주의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었다. 1900년경 영국, 프랑스, 독일은 중국에 광범위한 세력권을 구축했다. 일본은 조선과 타이완을 점령했고, 미국은 푸에르토리코와 필리핀을 스페인한테서 빼앗았고, 영국과 러시아는 이란을 나눠 갖기로 비공식적으로 합의했다.

 

 

제국주의 침략의 교두보, 수에즈 운하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개발한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인들의 커다란 희생 위에 건설된 것이었다. 공사 중에 동원되어 죽은 사람의 수는 약 1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11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163킬로미터에 이르는 수에즈 운하가 완공됨으로써 마침내 1869314일 홍해의 물과 지중해의 물이 만나게 되었다. 현재 전 세계 물동량의 14%가 지나가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은 동양과 서양을 최단거리로 이어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아프리카 동해안 및 인도양과 아시아로 가는 항로는 절반으로 줄어들어다. 그전까지는 유럽에서 아프리카 동해안을 가려면 아프리카 남쪽의 희망봉을 돌아가야 했지만 수에즈운하가 개통되면서 지중해를 거쳐 곧장 인도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에게 운하의 개통이 오히려 독이었다. 운하가 개통됨으로써 유럽열강들의 눈은 아프리카로 향했고 결국 대륙의 90%가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에즈운하 개통의 최대 수혜자는 영국이었다. 리버풀과 봄베이를 오가는 데에 희망봉을 돌아 120-180일 걸리던 것이 70~110일 정도로 단축되어 영국은 인도를 수월하게 지배했음은 물론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오세아니아 주에도 가까워졌다.

 

 

제국의 신경망, 전신 ; 제국주의와 과학

제국이 팽창하면서 본국 정부와 식민지 사이의 의사 소통 문제가 제기되었다. 특히 제국이 지리적으로 광대해지면서 아시아나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이 본국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도 본국의 통치권 아래 놓기 위해 이 지역들에 대한 빠른 의사 결정이 요구되었다. 1830년대 등장한 전신은 팽창하는 제국에게 축복이었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해에 처음으로 육상 전신이 가설된 후, 1850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 해협에 최초의 해저 전신이 설치되고, 1866년에는 영국과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대서양 해저전신 가설에 성공하고 이어 인도, 홍콩,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까지 확대됨으로써 제국의 신경망이 만들어졌다. 통신과 교통의 발달은 제국주의의 해외 진출과 식민지 경쟁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1857년의 세포이 항쟁과 1898년의 파쇼다 사건에서 전신이 지니는 힘과 효율성이 입증되면서 전신은 제국 운영의 핵심적인 조력자로 부각되었다. 가령 파쇼다 사건의 경우, 제국주의 팽창 과정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이집트에서 충돌했을 때, 영국군은 잘 깔려있는 전신망 덕분에 본국에 신속하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은 반면 전신망을 가지고 있지 않던 프랑스는 결국 적군이었던 영국의 전신망을 통해 이집트의 자국군 상황을 보고 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전신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은 파쇼다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의 상황을 축소해서 프랑스 본국에 알려줌으로써 상황을 자국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전신의 발전은 제국이라는 맥락 하에서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과학기술이 제국에 의해 변모되었다.

 

 

남아프리카와 세실 로즈

어려서 몸이 허약했던 세실 로즈(1853~1902)는 요양을 위해 17세에 영국에서 기후가 좋은 남아프리카로 건너왔다. 그는 다이아몬드와 금 채굴 사업에 손을 대 성공을 거두었다. 1887년에는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라는 광고로 지금도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지배하는 드 비어스사를 세웠다. 로즈는 철도, 통신, 신문 등의 기업 경영에도 손을 대 남아프리카 경제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고 1890년에는 37세의 나이로 케이프 식민지의 총독이 되었다. 로즈는 영국 정부, 의회, 언론의 유력 인사를 매수해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설립 특권을 획득한 후 영국 정부를 대신해서 무제한적으로 아프리카 오지를 정복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특권을 얻은 로즈는 원정군을 조직, 오지를 정복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로디지아’(‘로즈의 나라라는 의미, 현재의 짐바브웨)를 영국 남아프리카회사의 토지로 만들었다. 나아가 로즈는 트랜스바알공화국과 오렌지공화국에 눈독을 들였다. 영국이 케이프 식민지를 차지하자 19세기 중엽 네덜란드계 후손인 보어인들이 영국을 피해 북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트랜스바알공화국과 오렌지공화국에서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99년 영국이 보어인의 두 나라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이 벌어졌다(남아프리카전쟁[보어전쟁]). 영국은 20만 명 이상의 군대를 보내 이곳을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TIP 남아프리카 전쟁(보어전쟁)과 보이 스카우트

2007년 현재 약 216개 국가 연맹에서 약 2,800만 여명이 활동하고 있는 보이 스카우트의 창시자로 알려진 베이든 포우엘(1857~1941)은 장교로서 남아프리카전쟁(보어전쟁)에 참가했다. 그는 1899년 작은 마을인 마페킹에서 보어인들에게 포위되었는데, 700명의 군인으로 217일간의 전투 끝에 9,000 여명의 보어인을 물리치고 그 공로로 경(sir)이라는 귀족 작위까지 받았다. 마페킹 전투 당시 병력의 부족했던 그는 마페킹의 원주민 소년들을 척후병으로 활용했는데, 소년들의 척후(scout) 활동과 전령 활동이 전투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용감한 소년들의 활동에서 시사를 받은 포우엘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소년들은 행동이 민첩하고, 용감하고 책임감이 매우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포우엘은 아프리카인의 생활 형태와 군대 생활에서 체득한 야외 생활법, 추적활동 등을 소년들이 특성에 맞도록 정리하고, 자연 속에서 소년을 훈련시키데 필요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 결과를 토대로 1907년 여름 포우엘은 22명의 소년을 데리고 영국 남부해안의 한 섬에서 비공개 속에 시험적으로 야영을 실시하였다. 이 야영이 스카우트 운동의 효시이다.

시험 야영에 성공한 베이든 포우엘은 1908년 그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생각하고 실천한 결과를 토대로 최초의 스카우트 교본인소년을 위한 스카우트 활동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발행 즉시 영국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읽혀지고, 이어 세계 여러 나라에 소개되어 각국이 스카우트를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야만의 역사󰡕

 

[사료] 백인의 짐

백인으로서 백인의 짐을 져라

그대가 낳은 가장 뛰어난 자식을 보내라

그대가 정복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불안정하고 야만적인 사람들

그대가 새로 붙잡은 소란스러운 사람들,

절반은 악마이고 절반은 어린애 같은 사람들에게

고집불통인 새 식민지에 와서 일하여

무거운 수레를 끌도록 해라

-키플링, 백인의 짐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문명이 정점에 도달해 있다는 확신 하에 식민지 정복에 도덕적 임무를 부과했다. '열등한' 세계는 앞선 문명의 지도 하에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이자 정글 북의 저자로 유명한 키플링의 백인의 짐(The Whiteman's Burden)에 이러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영국 제국주의를 찬양했던 그는 많은 시간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보냈고,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 소유주이면서 정치가인 세실 로즈로부터 집을 선사받기도 했다. 제국주의를 신봉하였던 키플링은 모든 영국인, 더 넓게는 모든 백인이 미개한세계의 원주민들에게 유럽 문명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에는흑인의 짐(The Blackman's Burden)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영국의 노동당원이었던 모렐은 이 책을 통하여 아프리카 콩고에서 있었던 흑인에 대한 학대를 비판하였다. 그의 책 제목은 키플링의 시를 비꼰 것이었다.

-󰡔帝國主義時代󰡕

 

 

[사료] 아프리카인에게 비친 백인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백인은 식인귀나 악마로 통한다. 유럽인이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마을에 들어갈라치면, 조금 전까지도 그토록 평온했던 마을은 공포와 소란의 뒤죽박죽 되어버린다.

-리빙스턴, 잠베지강과 그 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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