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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세계사][사회주의와 노동]노동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심층분석

by 9급일벌 2021. 2. 2.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목차

 

1. 들어가기

 

2.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발생 조건

1) 무산계급화

2) 열악한 노동조건

3) 심각한 여성ㆍ어린이 노동

[사료] 1841년 어느 여공에 대한 기록

 

영국의 노동운동

1) 영국 노동운동의 특징

2) 러다이트(Luddite) 운동

3) 피털루의 대학살

4) 1830년대의 오언주의

5) 차티스트 운동

6) 노동귀족

 

 

프랑스의 노동운동

1) 프랑스 노동운동의 전개 양상

2) 파리 코뮌

3) 생디칼리즘 Syndicalism

 

독일의 노동운동

1) 독일 노동운동과 사회민주당

2) 수정주의 논쟁과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1. 들어가기

 

19세기 유럽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혁명의 시대였다.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해방은 지상명령이었다. 그리하여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는 시대의 대명제로 떠올랐고,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요구를 압축적으로 대변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모순이 극복되면 또 하나의 새로운 모순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인류사의 일반적인 발전 모습이었다. 신분과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은 자본과 개인주의의 사슬에 다시 얽매이게 되었다. 자본은 인간을 상품으로 전락시켰고 개인주의는 인간을 계급적 이기주의의 노예로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태아들이었다. 결국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항상 살아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 운동조차 불온시되는 오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세계사 교육에 있어서도 19세기 유럽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가 그 역사적 위상에 걸맞는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기존 세계사 교육과정에서 19세기 유럽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는 산업혁명이 초래한 문제라는 좁은 시각에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현실의 문제에서 벗어나려는 해방정신의 발로이다. 이 해방정신은 어떤 의미에서 희망의 원리이며, 역사적으로 사회 진보와 발전의 길을 열었다는 적극적인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위상은 세계사 교육에서 재정립되어야한다.

 

 

2.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발생 조건

1) 무산계급화

농업과 비농업부문에서의 임노동의 대두와 확산은 비록 시기와 형태, 그리고 강도에서 차이가 있으나 이미 19세기 이전부터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9세기를 경과하면서 이러한 추세가 현저히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1800년에 무산자자신의 노동력만이 유일한 생계수단인 사람와 그가 부양하는 가족의 수는 전체 유럽을 통하여 9,000만 명이었으나, 19세기 말에는 3배가 넘는 3억으로 증가했으며, 이는 유럽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무산계급화의 과정은 19세기를 통하여 대다수 유럽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회적 경험이었던 것이다.

 

2) 열악한 노동조건

산업혁명 초기의 노동자들은 대단히 열악한 조건에서 작업을 했다. 공장의 작업시간은 1850년 이전에는 보통 하루 12시간에서 14시간이었다. 작업 환경은 불결하고 위험했다. 기계는 안전시설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유독 물질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제조공정도 많았다.

1840년대 영국 의사들은 조사를 통해 특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장시간의 공장노동과 가혹한 작업여건으로 발병한 희생자들을 분류해 놓고 있다. 척추가 굽어지는 증상과 기타 골격상의 기형이 기계 앞에서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장시간 서있는 데서 야기되었다. 정맥이 튀어나오거나 발바닥 중심부가 내려앉는 증상도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3) 심각한 여성ㆍ어린이 노동

산업혁명 이후 남성 노동자보다 임금이 싸다는 이유로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노동착취는 더욱 가혹해졌다. 특히 어린이의 경우 아직 어려 저항이 불가능했기에 밤새도록 일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심지어 5세 미만의 아이들이 노동자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오랜 노동에 지친 아이들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등 비인간적인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어린이 노동자의 평균 수명이 17세 미만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에 대한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준다.

 

[사료] 1841년 어느 여공에 대한 기록

아침 430분 소녀의 어머니는 딸을 깨웠다. 화롯가에 놓아둔 냉커피를 마시고 빵을 한 입 물고서 아침 식사를 들고 공장으로 간다. 그녀는 공장에 도착해서 옷을 벗고 일할 준비를 한다. 시계가 5시 반을 친다. 엔진이 움직이고 그녀의 하루 일이 시작된다.

730엔진이 속도를 늦추는데 손으로 기계를 닦고 약간의 음식을 집어삼키는 짧은 시간을 위해서이다. 엔진은 다시 가동되어 전속도로 12시까지 계속 달린다. 1230분 그녀는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고 후에 마실 음료수를 싸가지고 간다. 그 다음 7시까지 1분의 쉴 틈도 없다. 이것이 일주일 중 6일 동안 되풀이 된다.(한두 시간 일찍 돌아올 수 있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나는 그녀의 나이가 몇 살일까 하고 생각해 봤는데 15살이나 되었을까 그녀는 맨체스터 상당수 공장 여공의 한 표본이다.

-󰡔영국 민중사󰡕

 

영국의 노동운동

1) 영국 노동운동의 특징

첫째, 민주적 의회제도의 기본틀 속에서 노동자적 이해관계의 관철을 시도하였다. 둘째, 따라서 여기서의 노동운동은 기존 제도와 법질서의 혁명적 타파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개량주의적, 점진적, 진화론적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셋째, 그와 함께 대단히 실용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차원에서의 노동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도모하는 세계관적인 이데올로기 운동(, 사회주의)이 발붙이지 못하였다.

노동자들은 의회를 통해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충분히 대변되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정당들은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개별 노동자 대표들도 지역적 선거동맹을 통해서나 노동대표연맹을 통해 하원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1906년 노동당이 창설되었다. 의회정치적 공간이야말로 영국 노동운동의 기본범주였던 것이다.

 

2) 러다이트(Luddite) 운동

1811년 정체 불명의 장군 네드 러드(Ned Ludd)가 보낸 최초의 협박장이 노팅검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1816년까지 여러 지역에서 기계 파괴 형태의 운동이 일어난다. 이를 러다이트 운동이라 부른다.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의 도입으로 실업 상태에 빠진 노동자들이 단순하게 기계를 파괴한 것은 아니다. 실제 러다이트 운동은 다양한 목표를 가지고 진행되었는데, 노팅검 지역의 경우 기계는 그 자체가 노동자들을 몰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짓을 저지른 고용주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파괴되었다.

정부는 기계를 파괴한 노동자를 검거해 교수형에 처하는가 하면 군대를 동원해 현장에서 사살하며 운동을 진압하였다.

 

 

3) 피털루의 대학살

급속한 무산계급화의 과정을 겪고 있던 18세기 말의 영국 하층계급에게 프랑스 혁명은 그들의 불만을 표현할 계기를 주었다. 이들은 페인의 󰡔인간의 권리󰡕를 성전으로 삼고 완벽한 정치적 개혁, 즉 성년 남자의 보통 선거권과 임기 1년의 의회, 비밀 투표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유산자들의 대응은 각종 악법을 동원하여 하층민들의 정치집회와 시위, 노조결성, 파업과 폭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 충돌의 정점은 1819년 맨체스터 세인트 피터 광장에서 발생했다. 이 날의 집회는 북부에서의 의회 개혁 운동의 거대한 절정을 이룰 예정이었다. 하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한 자랑스런영국 기병대에 의해 집회는 무참히 공격받았는데, 11명이 죽고 4백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피털루 학살은 하나의 상징이 되어 전국의 대중 집회에서 비난받았다. “저 피털루의 유혈극을 기억하라” 20년 후 차티스트의 기치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4) 1830년대의 오언주의

면방적업에서 성공한 사업가 로버트 오언은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렀지만, 공동체주의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오언주의자들은 사회가 실험 공동체에 의해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명칭도 노동자 모두가 함께 일하고 공동의 노력과 결과를 공유하는 협동조합의 이상에서 유래하였다. 이들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모든 범죄와 탐욕은 악한 환경의 결과라고 믿었다. 만약 사람들이 강자에 의해 약자가 노예화되는 사회구조와 악덕한 관습으로부터 벗어난다면 모두는 함께 조화와 평화속에서 살 수 있으리라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공동체촌을 건설하고, 협동조합의 운영을 통해 근본적이고 평화적이며 직접적인 사회 변화를 꾀하였다. 오언주의를 바탕으로 스코틀랜드의 오비스턴(Orbiston)과 인디애나의 뉴하모니(New Harmony)에 협동조합을 건립하였으나 제대로 운영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오언의 사상 중 노동가치설의 수용과 자유방임적 경쟁 대신 협동을 새로운 사회원리로 강조한 점은, 고통받던 수공업자와 숙련공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졌다.

이 외에도 프랑스의 생시몽은 생산하는 사람들, 산업계급에 의한 평등사회를 주창하였으며, 푸리에는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를 위한 공동체 사회를 제창하였다.

 

5) 차티스트 운동

1832년의 제1차 선거법 개정은 중간계급에게만 투표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노동자들은 불평등한 계급적 입법과 부패한 정치구조를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해악의 근원으로 간주하였다. 그 결과 1837년에 대두하여 1848년까지 노동계급의 대규모 운동으로서 위력을 떨친 것이 차티즘이다.

1837년 런던 노동자협회에서 작성하고 이듬해 8월 채택된 인민헌장에서 유래된 이 운동은 1839, 1842, 1848년 세 차례의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통해 600만 이상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가 하원에 제출되었으나 무위로 끝났다. 특히 1848년의 청원은 유럽 대륙의 혁명적 기운에 편승하여 기도하였으나 정부의 위협 하에 의회로의 행진도 스스로 포기해버린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1848년 이후 차티즘은 소멸된 것은 아니나 대규모 민중운동으로서의 위력을 상실하였다.

차티스트 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우선 지도부의 극심한 대립과 반목을 들고 있다. 이 대립은 운동의 방법 문제가 컸는데 이는 도덕적 힘(설득과 선전)’에 의존할 것인가 혹은 물리적 힘(무장봉기)’에 호소할 것인가였다.

또한 국가정책과 지배계급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계급적 지배의 수단으로 간주되던 국가의 기능이 더 이상 한 사회세력의 이익만을 조야한 형태로 반영하지는 않을 정도로 융통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0년에 500여 명의 차티스트 운동가들을 검거하여 투옥하던 국가권력은, 다른 한편으로는 1840년에 공장법을 개정하며 공장제의 문제점을 시정하려고도 하고, 1847년에는 10시간 노동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848년부터의 경기회복으로 노동계급의 의식도 함께 둔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6) 노동귀족

19세기 중엽의 20여 년간은 영국을 필두로 전개된 산업자본주의가 전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자본의 시대였다. 이른바 중기 빅토리아 타협으로 불리는 노자관계의 안정화는 국제시장에서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한 영국의 자본과 노동간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협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노동귀족이었다. 노동귀족은 노동계급의 상층부분 기술과 임금수준, 고용안정성이 높고, 따라서 사회적으로 좀더 나은 위치에 있는 숙련공들 을 지칭한다. 이들은 전체 노동인구의 10-20% 정도였으며, 대개 비숙련공의 2배가 넘는 임금을 받았다.

이들 노동귀족들은 이 시기 신형조합(New Model Union)’을 형성하였는데, 신형조합은 파업과 같은 노동쟁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숙련공들간의 상호부조에 주된 목표를 두었다. 특히 노조회비를 의도적으로 높게 책정하여 비숙련공들의 참여를 배제하였다. 이들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노동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했고, 이는 1840년대부터 부르주아나 주도적인 지식인들이 소위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노동자에 대하여 우호적 감정을 가지게 된 것과 연관되었다. 이 협조는 결국 1867년 제2차 선거법 개정을 실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프랑스의 노동운동

1) 프랑스 노동운동의 전개 양상

상퀼로트로부터 출발한 프랑스의 근대적 노동운동은 7월 혁명과 2월 혁명을 거치면서 초기 사회주의적 이념과 접합되고 또 그 과정에서 급진성과 계급성을 더하여 갔으나, 고용주에 대한 적대감과 재산권의 폐지,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 대한 분석에서 철저하지 못한 양상도 동시에 보여주었다. 19세기 중엽의 경제적 호황은 프루동이 강조한 숙련공 위주의 협동조합적 노동운동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노자간의 계급갈등도 한결 완화되는 경향을 조장했다.

그러나 1871년 파리코뮌과 그에 뒤이은 제3공화정의 거센 정치적 탄압은 부르주아에 대한 노동계급의 태도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프랑스 급진주의는 여러 이념의 영향 아래 상당히 혼란된 양상을 보였다. 어쨌든 1898년에는 여러 사회주의 정당들이 총유권자의 8%에 해당하는 75만 표를 획득할 만큼 성장했다. 1905년에는 이런 여러 정치적 분파를 결속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어 마르크스주의적 혁명노선과 개량주의적 입장을 절충한 통합사회당이 결성되었다.

 

 

2) 파리 코뮌

파리 코뮌은 1871328일부터 528일까지 존속한 파리 시민, 특히 노동자 주도의 자치정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19세기 중엽의 온건한 프랑스 노동운동이 급진화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1870년 보불전쟁은 프로이센의 일방적인 우세로 진행되어, 94일 세당 전투에서 프랑스가 참패하고, 2 제정의 황제마저 포로가 되었다. 곧이어 파리에서는 공화주의 임시정부가 들어서고, 4개월에 걸친 프로이센 군대의 파리 포위공격이 뒤따랐다. 18711월 말의 굴욕적 강화와 그에 뒤이은 정부의 급진세력 탄압은 파리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조직적 반발을 야기했다. 급기야 3월 말경에는 이들의 자치정부가 수립되는 혁명적 국면으로 발전했다.

코뮌의 정치적인 구성은 1793년의 재현을 꿈꾸는 자코뱅파, 민중 독재를 지지하는 블랑키파, 지방분권을 원하는 무정부주의 프루동파, 사회주의적인 개혁을 원하는 제1인터내셔널파 등 다양했다. 419일 만장일치로 채택된 프랑스 국민에게 보내는 선언은 공화국을 수립할 것이며, 공화국은 더 이상 중앙 집권적이 아니라 프랑스의 모든 코뮌들의 연방일 것임을 선언했다. 포위 공략을 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코뮌의 정책에 일관성은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코뮌이 공화정, 도시의 자치, 독일에 대한 저항을 원했다는 점은 틀림없다.

521일 베르사유군이 밀고 들어왔다. ‘피의 일주일(1871521-528)’이 시작된 것이다. 528일 파리의 시립 공동묘지인 페르 라셰즈의 한 벽에서 코뮌군 147명이 처형됐다. 베르사유군은 8887, 코뮌군은 2만여 명이 죽음을 당했다. 4만 명 가까운 파리 시민이 체포되었고, 75백 명의 코뮌 가담자들이 유배됐다.

 

3) 생디칼리즘 Syndicalism

생디칼리즘은 19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되어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발전했던 혁명적 성격의 노동조합운동을 뜻한다. 이것은 혁명적 노조원들이 자기들을 노조 내의 개량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같은 정치 지향적 노동자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한 용어였다. 생디칼리즘은 자본주의 체제 비판과 계급투쟁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혁명적인 사회 변혁을 이루는 데 가장 큰 가치를 두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파괴를 통한 프롤레타리아의 궁극적인 해방과 국가 자체의 전복이 목표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프랑스 노동총연맹(CGT)의 정치적 목적이었다.

생디칼리즘 형성의 중요한 국면은 19세기말 아나키스트들과의 결합이었다.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즘의 결합은 혁명적 생디칼리즘을 탄생시켰다. 정치에 대한 불신, 사회주의 정당에 대한 반대, 반국가적 태도, 지식인에 대한 불신 등을 견지하면서 오직 생디카의 활동을 극대화하는 데 최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총파업과 같은 직접 행동을 찬양하는 프랑스 생디칼리즘의 독창적이고 중요한 특징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역량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야심에 미치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CGT는 총동원령이 곧 총파업을 알리는 신호이며, 혁명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총동원령이 내려졌을 때 노조원들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애국 대열에 가담함으로써 혁명적 생디칼리즘은 붕괴됐다.

 

 

독일의 노동운동

1) 독일 노동운동과 사회민주당

독일은 1860-73년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이전에는 미약했던 노동운동이 양적으로 팽창하게 되었다. 1840년대에 등장했다가 해체되거나 쇠퇴했던 숙련공 노조들이 재건되며 다시 등장했다. 게다가 보수적인 자유노조카톨릭 노조도 등장하여 독일의 노동운동은 꽤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당시 노조원의 수는 전체 임노동자의 약 4% 정도에 불과하였다. 즉 사회적 구분이 뚜렷한 계급운동으로서의 노조운동은 아직 독일에서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ㆍ프랑스와 달리 독일에서는 1860년대와 70년대에 이미 노동자 정당이 결성된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라살레, 베벨, 리프크네히트의 주도하에 1863년과 1869년에 각각 독일노동자총연맹과 사회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고, 1875년에 이들 두 조직이 통합되어 현재의 독일사회민주당(SPD)으로 출범했다. 사회민주당의 출현은 노동계급과 자유주의의 궁극적 결별을 뜻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았다.

 

 

2) 수정주의 논쟁과 사회민주주의

베른슈타인은 1890년대 후반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수정주의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19세기 후반 독일을 비롯한 유럽 자본주의의 발달을 보면서 마르크스주의에 점차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 혁명 가능성 및 효용성에 대한 회의, 독일 제국의회 선거에 도입된 보통선거제에 대한 기대, 그리고 사민당이 제국의회 선거에서 획득한 높은 지지율 등에 고무되어 민주적 방식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본주의 제도의 부도덕성과 모순을 계속 비판하였지만,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론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중산계급의 증가와 민주적 장치의 발달에 의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사유재산제의 지양과 사회화를 주장하면서도 사회화의 속도와 범위는 매우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사기업이 보다 능률적이라고 판단되는 부분은 일정기간 그대로 두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비조합과 노동조합을 통해 경제적 민주주의가 확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정치적으로 의회 민주국가의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와 좀더 철저하게 결별하게 된다. 혁명적 방식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론은 그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반면에 개혁적 방식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은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이론은 사회주의 진영 내에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초기에는 반대자들의 목소리가 강하였으나, 2차대전 이후 수정주의는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볼셰비키 독재체제를 경험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에 토대를 둔 사회주의의 중요성이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케인즈 경제학을 기본으로 한 복지국가의 건설을 새로운 목표로 제시하며 유럽 사회의 주요한 흐름의 하나로 사회민주주의를 형성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사회 질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던 1830년대에 처음 사용되었는데,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사회적 원리인 자유방임주의, 특히 개인주의의 대립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초기 사회주의는 주로 개인주의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물질적 기반인 사적 소유제를 철저하게 비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꿈꾸는 이상 사회도 자유주의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보다는 그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따라서 사유재산제의 철폐와 소유권의 공동 향유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보다는 공산주의를 선호했다. 공산주의는 분할할 수 없는 재산의 공동 소유라는 의미의 법률적 용어로서 사회주의보다 먼저 사용됐다.

1860년대에 들어서면 공산주의는 사용 빈도가 낮아진 반면,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나 정당들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채용하는 등 사회주의가 지배적인 용어로 자리잡았다. 잊혀져가던 공산주의란 용어를 부활시킨 인물은 레닌이다. 19172월 혁명 이후 레닌은 당의 명칭을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으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 및 개인의 노동 성과에 따른 생산물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주의에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그리고 그것의 원리인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이다. 자유주의의 본질은 한마디로 자유 경쟁이다. 자유주의는 경쟁에서의 승자와 패자 사이에 발생하는 불평등을 불가피한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사회주의는 평등을 이상적인 가치로 보며, 불평등의 근원이며 만악의 근원인 사유재산제의 폐지를 제창한다. 사회주의의 핵심은 사유재산권의 폐지에 있다. 소유권의 보장 여부야말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근본적인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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