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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세계사]과학의 발달과 계몽사상에 대한 심층분석

by 9급일벌 2021. 2. 2.

 

과학의 발달과 계몽사상

목차

 

1. 들어가기

 

2. 과학의 발달과 계몽사상

 

-과학혁명

1) 과학혁명과 패러다임

2) 과학혁명의 의의

TIP. 뉴턴의 프린키피아

3) 과학?기술과 유럽중심주의 -과학혁명과 산업혁명과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견해

 

-계몽사상

[사료] 임마누엘 칸트 ??계몽사상이란 무엇인가?? (1784)

TIP. 계몽사상의 전제들

1) 사회계약설

TIP. 볼테르의 사회관

2)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TIP. 국부론 다시보기

3) 계몽사상의 보급 -백과사전

4) 계몽사상가와 계몽군주

5) 계몽사상과 대중

 

6) 계몽사상 다시보기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

계몽사상가의 양면성

TIP. 계몽사상가들의 편견

계몽사상과 진보사관, 그리고 유럽중심주의

TIP. 진보사관의 사례

 

 

 

1. 들어가기

 

유럽에서는 대항해 시대와 더불어 과학이 발전하고 국가 차원에서 앞다투어 과학을 장려하여 왕립 아카데미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유럽은 이제 과학을 무기로 세계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기존 교과서에서 17세기 과학혁명은 유럽이 근대적인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사건으로 높이 평가된다. 과학의 발전과 그에 따른 합리적 사고가 근대에 와서 유럽이 다른 세계보다 우월해지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계몽사상도 마찬가지이다. 계몽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을 통해 진보를 이룰 수 있다. 계몽사상을 토대로 유럽사회를 더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형태로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시민혁명을 쟁취해 낼 수 있었고 그 토대 위에 산업혁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성이 유럽에 의해 발견되고 유럽인만이 진보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인들만이 무지와 몽매, 종교적 광신에서 벗어나 세속적이고 합리적이며 자유로운 세계관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계몽사상가들이 인종주의자였고, 그들이 주장하는 세계시민주의라는 것은 사실상 유럽인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매우 제한되고 차별적인 원리였다는 사실은 은폐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과학혁명과 계몽사상이 지닌 한계나 문제점에 대해서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본 주제에서는 과학의 발달과 산업혁명과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소개하고, 계몽사상의 내용과 그것이 지닌 한계, 양면성 등을 함께 집어보고자 한다.

 

 

2. 과학의 발달과 계몽사상

 

과학혁명

1) 과학혁명과 패러다임

과학적 사회는 패러다임들이라고 부르는 테두리 안에서 작용한다. 패러다임들은 법칙, 이론, 적용 그리고 기구사용을 포함하는 과학적 탐구의 일관적인 전통이다. 그것들에는 보편적인 과학탐구의 핵심이 되는 다수의 미해결의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과학자들은 새로운 발견을 위해 자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의 모든 과학적 세계에서 모호한 영역들을 명석하게 하고자 한다. 역사가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니 뉴턴의 역학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 사실 그는 패러다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토마스 쿤의 지적처럼 발견은 예외의 인지와 더불어 그리고 자연은 패러다임을 어느 정도 무시한다는 사실의 인지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과학혁명은 낡은 패러다임이 전체적으로든 혹은 부분적으로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과정인 것이다. 낡은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은 양립할 수 없다. 과학자 사회는 하나의 새로운 모델에 부딪치게 되는데, 연구는 그것의 한계 내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2) 과학혁명의 의의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란 17세기를 중심으로 서구에서 일어난 근대 과학의 성립이라는 사태를 세계사에서의 근대를 결정지운 획기적인 일로 파악한 명칭이다. 과학혁명은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했고, 베잘리우스가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를 출판한 1543년에 시작하여,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판한 1687년에 절정에 달한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은 중세적 패러다임을 무너뜨리고 근대적 패러다임을 수립하는데 기여했다. 즉 질서정연하게 통합되고 합리적, 법칙적으로 운행되는 기계적수학적 우주관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또한 과학혁명은 미신과 종교적 편견, 잘못된 인습과 전통을 타파하여 계몽된 시대를 열었으며, 과학지식과 새로운 발명은 기술을 발전시키고 또한 이를 이용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근대 산업혁명을 이룩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자본주의적 팽창을 배경으로 하는 서구의 세계지배가 가능하게 되어 이후 세계사에서 서구의 우위가 유지될 수 있었다.

 

 

TIP. 뉴턴의 프린키피아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피키아)󰡕는 갈릴레오의 낙하물체의 법칙과 케플러의 항성 운동의 법칙, 베이컨식 관찰과 데카르트식의 수학 등 우주에 관한 과학적합리적 탐구들을 하나의 기계과학으로 종합하였다. 뉴턴은 중력을 우주적이고 통일적인 힘으로 생각했다. “우주의 모든 물체의 소립자들은 모든 다른 소립자들을 끌어당기는데 이때 발생하는 인력은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한다.” 이러한 뉴턴의 법칙이 받아들여지면서 거대한 시계와 같이 움직이는 기계적 우주에서 신의 자의적이며 기적적인 개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서양사 개념어 사전󰡕,󰡔서양근세사󰡕

 

3) 과학기술과 유럽중심주의 -과학혁명과 산업혁명과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견해

유럽중심적인 시각에서는 1500년 이후로는 유럽의 기술이 아시아의 기술보다 내내 우위에 있었고,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산업혁명으로 연결되었다고 보고있다. 그러나 실제로 드러나는 증거를 보면 과학혁명이 17세기에 일어난 이후로 두 세기가 지나도록 유럽에서 조차 과학은 기술과 산업의 발전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17세기의 과학적 진보가 18세기의 산업혁명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로버트 애덤스는 산업혁명이 낳은 걸출한 기술 중에서 명백히 과학에서 비롯되었다는 말할 수 있는 것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은 숙련공의 노련한 경험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술개발의 일등 공신이 장인정신, 사업가 정신, 심지어는 신앙심이었으며, 과학이 기술발전에 이바지한 공헌도 보다는 기술이 과학발전에 이바지한 공헌도가 압도적으로 높다고 말한다. 결국 17,18세기, 심지어는 19세기 초반까지도 과학이 기술발전이나 산업혁명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한 1500년 이후 유럽이 기술적 우위에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같은 시기 아시아에서는 총포, 조선술, 인쇄술, 직물, 야금석탄동력 등 여러 분야에서 유럽보다 뒤처지지 않거나 더 우수했다. 또한 유럽만의 기술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의 기술발전은 세계 경제의 과정이며, 그것은 세계경제/세계체제의 구조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결국 특정 지역이나 집단이 독점이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그러한 우위가 예외적인 제도문화문명인종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계몽사상

계몽사상이란 영어의 ‘Enlightenment(빛을 비춤, 계몽)’, 불어의 ‘Lumiere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의 빛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에서 발현하는 빛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다. 계몽()은 이성이었고, 계몽시대는 이성의 시대였다. 계몽사상가들은 이성이 발견한 법칙 위에서 인간의 역사는 무한히 진보할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지식은 경험에서,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인도하는 관찰에서 비롯되며, 진리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관찰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많은 계몽사상가들은 신, 창조, 사후 세계의 존재는 받아들였지만 창조주가 자의적으로 현세에 개입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고 기계적인 법칙으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이신론자들이었다. 그들은 구체제의 모순에 대한 비판, 올바른 지식의 습득과 교육 및 과학을 통한 교회의 교조적인 권위와 미신 철폐, 각종 무지 및 그로 인한 오류로부터의 해방 등에 공통의 관심을 보이면서 다양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그들의 사회비판은 사회변혁의 움직임으로 이어져 그 과정에서 계몽사상은 시민혁명의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사료] 임마누엘 칸트 󰡔계몽사상이란 무엇인가󰡕 (1784)

계몽사상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과한 미성숙 상태와의 결별이다. 미성숙 상태란 인간이 다른 어떤 것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미성숙 상태의 원인은 지성의 결핍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도없이 사고하려는 결단과 용기가 없을 때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감히 알려고 하라! 이것이 계몽사상의 모토이다

-󰡔서양문명의 역사 3󰡕에서 재인용

 

TIP. 계몽사상의 전제들

첫째, 우주 전체는 완전히 이해될 수 있으며 초자연적인 힘보다는 자연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다. 둘째, 과학적 방법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모든 연구 분야의 근본적인 의문에 답할 수 있다. 셋째, 인류는 거의 무한정하게 진보해 나갈 수 있도록 교육될 수 있다.

-󰡔서양문명의 역사 4󰡕

 

1) 사회계약설

하느님이 일상적인 인간사에 개입한다는 것을 더 이상 당연시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켜야 했다. 뉴턴의 우주관을 수용한 사람은 이제 왕권신수설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론을 믿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전혀 왕답지 못한 왕을 무수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사회계약이라는 관념에서 찾았다. 특정 국가의 테두리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이 정부의 형태와 권한에 대해 합의에 이르렀다고 전제하는 사고방식이었다.

 

홉스는 사악하고 잔인한 본성을 타고난 인간이 절대군주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지 않으면 문명사회를 확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로크는 계약은 공중과 통치자 사이에 맺어지는 것이므로 통치자가 특정 한계를 벗어나면 인민은 그의 권리침해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논했다. 로크의 이론은 명예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해 제시되었지만, 이후 아메리카 독립전쟁 및 프랑스 혁명에도 중요한 사상으로 수용되었다. 로크 보다 훨씬 급진적인 견해가 루소에 의해 제창되었다. 그는 인민의 일반의지 속에 양도할 수 없는 파기할 수 없는 주권이 있으므로, 왕이 인민을 만족시키지 못한 경우에는 인민은 그 정부를 타도하고 새로운 정부로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소의 이론은 프랑스 혁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TIP. 볼테르의 사회관

그는 모든 형태의 억압, 광신, 편협함을 뜻하는 파렴치한을 분쇄하라라는 말로 시민적 자유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박해하는 자는 괴물과 다를 바 없다고 믿었다. 한 예로 자신의 적대자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보냈다. “나는 당신의 말은 한마디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목숨을 걸고 당신의 발언권을 옹호할 것이다.” 그는 온갖 종류의 불관용 가운데 종교적 편협성, 세속 국가의 전제권력을 자주 비판했다.

-󰡔서양문명의 역사3󰡕

 

2)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국부론은 계몽사상의 자연과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가장 현실적으로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개입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면서, 국유 기업의 경쟁이나 법률적 제약 없이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하면 모든 사람들이 최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자유방임이론을 주장했다. 경쟁과 자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부의 분배를 균등하게 균형잡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면 인간은 비록 이기적으로 각자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조화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스미스는 노예들은 자발적 노동을 할 수 없기에 자유 노동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든다며 자유 노동의 장점을 주장했다. 그는 봉건제와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 순수한 시장체제의 장점을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장체제에 관한 스미스의 해석은 일면적이었다. 그는 봉건제와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 시장체제의 장점을 찬양했지만 영국의 자본주의는 단지 평화로운 시장 경쟁을 통해서 나머지 유럽을 뛰어넘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노예제는 자본의 일부를 제공했고 식민지는 시장을 제공했다. 18세기 내내 국가 지출은 계속 높았는데, 그만한 국가적 배려가 없었다면 새롭고 수익성 있고 경쟁력 있는 산업들이 결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순수한 시장 체제에도 호황과 불황 같은 비합리성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재산의 규모가 불평등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시장에서 서로 대면하는 한 평등하다고 가정했지만 실제로는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충돌이 발생함을 간과했다.

 

 

TIP. 󰡔국부론󰡕 다시보기

스미스는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활동한 사람이었다. 그는 1776중국은 유럽의 어느 부분보다 부강한 나라라고 썼다. 운하와 하천을 이용하는 중국과 인도의 저렴한 수송비를 유럽은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라고도 지적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희망봉을 돌아 동인도제도로 가는 항로의 발견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2대 사건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이 두 사건을 유럽인이 인류에 안겨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불안감을 드러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유럽인의 대 아시아관, 특히 중국관은 근본적으로 변해버렸다. 유럽인은 처음에는 중국을 실례와 모델로 삼아야 할 나라로 보았다가 나중에는 영원히 정체된 민족이라고 불렀다. 산업혁명의 도래와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식민 지배가 본격화 하자, 유럽인의 의식은 바뀌었고, 유럽 중심적 사고가 발명되었다. 그런 면에서 서양의 비중있는 사회이론가 중에서 유럽이 국부(國富)의 발전과정에 뒤늦게 동참한 신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통찰한 사람은 스미스가 마지막이었다. -󰡔리오리엔트󰡕

 

3) 계몽사상의 보급 -백과사전

󰡔백과사전󰡕은 계몽사상가들의 방대한 기관지였는데, 디드로가 주관하여 볼테르몽테스키외루소콩도르세케네튀르고 등 160명의 기고자들이 함께 쓴 방대한 책이다. 1751년부터 1772년 사이에 분할본으로 간행되었는데, 모두 17권의 대형책자와 11권의 도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디드로는 그의 논문에서 지나간 여러 세기의 노력들이 다음에 다가올 세기의 무익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들 자손이 보다 나은 지식으로 보다 행복하고 보다 유덕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지식들을 집대성하는 것이라고 목적을 밝혔다. 그는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이룩한 최신 성과들을 전파하여 모든 영역에서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싸우고, 과학의 진보를 더욱 촉진시키며, 결국에는 인간이 처해있는 온갖 유형의 비참한 상태를 줄이고자 했다. 󰡔백과사전󰡕은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완간되어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로 계몽사상가들의 생각을 전파하는데 기여했다.

 

 

 

4) 계몽사상가와 계몽군주

의회와 정당 등 정치적 토론을 위한 공간의 부재, 자유 언론의 미흡함, 특히 문맹 대중의 존재 등과 같은 현실적인 제약은 계몽사상가들에게 상당한 딜레마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계몽사상가들은 개혁은 활발하고 개명된 주권자인 계몽 전제 군주에 의해서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다는 계몽 전제주의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셉 2,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등 주로 동유럽의 절대군주들은 정부 조직의 합리화, 세금감면, 무역에 대한 부담 제거 법률의 합리화 등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몽사상가들이 계몽군주의 힘과 권위를 정당화시키면서 절대주의적 사고방식을 조장하고 잔인한 사회정책을 용인한 측면 또한 없지않다. 계몽 전제 군주는 계속 전쟁을 추구하고 농노 제도 역시 존속시켰다.

 

5) 계몽사상과 대중

계몽사상은 미국의 독립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계몽사상가들은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상층 계급 인사들의 후원에 의존하는 반대파 지식인들이었기에, 사회의 전복이 아니라 사회 개혁을 희망했다.

대체로 계몽사상가들의 청중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귀족, 법률가, 정부관리, 부유한 상인, 소수의 고위 성직자 등이었다. 이러한 계급적 편향이 나타난 이유는 18세기 대다수의 하층민이 문맹이었으며, 남부와 남동부 유럽 대중의 대부분이 극히 보수적인 로마 카톨릭 조직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점 때문이다. 또한 계몽사상가들 역시 대부분 노동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썼다. 그들은 대중이 자신들의 사상의 영향으로 혁명을 초래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 예로 볼테르는 동료 계몽사상가들과 종교 문제를 논의할 때는 늘 하인들을 물리쳤다.

 

 

 

 

6) 계몽사상 다시보기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

계몽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발발 배경으로서 또한 혁명 진행의 원동력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급진적 이성지상주의는 이 혁명을 통해 그 과격한 측면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공포정치를 영도하던 로베스피에르는 이성을 신으로 하는 이성교를 제도화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혁명지도자들의 합리주의 숭상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또 하나의 예는 단두대이다. 이는 흔히 공포정치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기구를 사용했던 근거는 처형되는 사람에게 가장 짧게 고통을 주면서 소기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혁명기의 계몽사상가들의 후예들에게는 가장 합리적인처형 방법이었던 것이다.

 

계몽사상가의 양면성

계몽사상가들은 이성의 힘에 의한 인류의 진보를 믿었으며,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인간의 보편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비유럽인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계몽사상가들에게 이성과 문명은 전적으로 백인, 서유럽인과 동의어였고 유럽 외부의 비백인들, 즉 흑인, 홍인, 황인은 비이성, 야만성과 동일시되었다. 야만성은 물리적으로 유럽외부에, 또 밝음 외부에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유럽인의 문화적인종적 우월성을 고무시켰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미국 건국의 주역들도 노예제의 폐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헌법의 기초자인 제퍼슨의 경우 흑인의 열등성을 지적하며 그들은 더위에 강하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육체 노동에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TIP. 계몽사상가들의 편견

로크 : 로크는 아메리카의 노예제를 정당화하며 그 근거로 흑인이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자는 그 정도로 짐승이며 따라서 동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니그로는 부동산으로 간주될 수 있었고 니그로의 노예화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아메리카 인디언은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교육을 할 수 있고 크리스트교인이 될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인디언은 니그로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은 셈이다.

볼테르 : “흑인종은 사냥개와 똥개가 다른 것처럼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몽테스키외 : “어느 누구도 지혜로우신 신계서 영혼을, 그것도 선량한 영혼을 완전히 새까만 그들의 몸뚱아리에 불어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린네우스 : 각 대륙에 하나씩 네 개의 거대한 인간 입단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유럽인들은 법에 의해 지배되고, 아메리카인들은 관습에 의해, 그리고 아시아인들은 견해에 의해 각각 지배되며 아프리카인들은 제멋대로 행동한다.

나폴레옹 : “문명도 갖고 있지 않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어떻게 자유를 알게 하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백인이기 때문에 백인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정당하다

-󰡔역사와 이데올로기󰡕; 󰡔거울에 비친 유럽󰡕

 

계몽사상과 진보사관, 그리고 유럽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는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태도이다. 이는 비유럽 문명에 대한 유럽 문명의 독특성과 우월성을 주장하는 가치, 태도, 생각, 나아가 이데올로기적 지향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럽중심주의적인 역사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이 계몽사상시기부터 유럽에서 발전한 진보와 문명의 개념이다. 특히 근대유럽문명을 지배하는 대표 이념인 진보라는 개념은 인간의 역사는 무한히 발전하며 인간 사회를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진보사관을 발전시켰다.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행위가 역사의 진보를 만들며, 진보를 가져오는 주체인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다. 진보를 강조하는 유럽의 역사는 보편사로서 자리잡게 되었으며, 반면 비유럽 세계는 유럽인에 의해 발견되거나 정착되거나 정복됨으로써만 역사의 주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논리는 인종주의와 결부되어 유럽인에 의한 비유럽 세계의 침략과 식민화를 합리화하였다.

 

 

TIP. 진보사관의 사례

데이비드 흄은 인간은 수렵과 어로에서 농업단계로, 그리고 다시 상업이 지배적인 단계로 발전해 나가며, 상업이 지배하는 단계는 오직 유럽만이 지리상의 발견 덕분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후에 아담 스미스는 네 발전 단계 이론으로 이를 완성시켰다. 검은 아프리카와 북아메리카의 미개한 수렵 채취인들은 제 1단계인 수렵,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제 2단계인 목축, 오리엔트의 대부분은 제 3단계인 농업, 오직 서유럽만이 제 4단계인 상업단계라는 완전한 발전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유럽의 상업 사회들을 문명의 정점에 위치지우고, 유럽인이 우수하기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미개한 민족들에게 지적 혹은 물질적 진보로 가는 진정한 길을 제시하기 위해 그들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거울에 비친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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