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레포트

[불교와 인도][마가다 왕국][자이나교][아르타샤스트라][간다라미술][쿠샨왕조]불교와 고대 인도 제국 심층분석

by 9급일벌 2021. 1. 20.

목차

1. 들어가기

 

2. 불교와 인도제국

-도시 국가에서 영역 국가로

-마가다 왕국의 발전

-후기 베다 시대의 사회 조직-바르나제도

 

새로운 사상의 등장

1) 우파니샤드

2)자이나교

3) 불교

-TIP. 불교와 자이나교에서 불살생을 주장하는 경제적 배경

4) 불교와 자이나교를 지지한 상인들

-TIP. 불교의 경제관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활동 결과

 

마우리아 왕조의 통일

1) 찬드라굽타의 행정제도: 아르타샤스트라 (Arthasastra, 實利論)

-[사료] 아르타 샤스트라

2) 불교를 통한 사상 통일과 다르마에 의한 통치

-TIP. 아소카왕 석주-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의의

3) 마우리아 왕조의 멸망

-쿠샨 왕조

-안드라 왕조

-불상 제작과 간다라 미술

 

3. 참고문헌

 

 

1. 들어가기
인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좀처럼 현실적, 역사적 존재로 다가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중서적들과 대중 매체들은 현재 인도 사람들의 삶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세속을 초탈한 신비한 존재로 비춰놓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교과서 서술이나 학습 현장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고대 인도를 무대로 펼쳐졌던 많은 사람과 사건들은 존재도 없고, 불교와 힌두교만 존재하는 것이다. 다행히 근래 들어 그런 문제점을 비판하고 인도에 대해 바로 알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고대 인도도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영토 통일 전쟁을 비롯한 격렬한 변화의 시대였고, 주변 지역과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무엇보다 세계 종교인 불교가 탄생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이 주제에서는 기원전 10세기 도시국가 성립에서 기원 후 3세기 쿠샨왕조까지의 시기 동안 인도에서 벌어진 중요 사건들의 흐름을 알아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아리아인의 이주와 함께 전래된 종교는 브라만교로 변질되며, 초기의 도시 국가와 왕국들 간의 정복 전쟁과 철기의 보급은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다. 이를 배경으로 등장한 불교와 자이나교는 브라만 중심의 사회와 종교를 비판하였고, 이후 마우리아 왕조가 통일 제국으로 성장했을 때 아소카 왕은 불교를 중심으로 사상 통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을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진행됨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하였다. 역사에서 익히 보았던 모습들을 인도 역사에서도 되살리고, 그럼으로써 인도를 저 먼 신비한 나라에서 현실에 존재하는 세계로 되돌려 놓는 것이 이 주제의 목적이다. 


2. 불교와 인도제국

도시 국가에서 영역 국가로
철기의 보급으로 잉여 생산물이 증가하고 수공업이 발전하여 BC 10세기 이후에는 여러 곳에서 도시 국가 또는 부족 국가가 형성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BC 7세기 무렵에는 16개  국이 북부 인도에 할거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들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부족 연합 회의에 의해 지배되는 공화제 국가이다. 왕국은 주로 갠지스강 주변에 생겨났다. 공화제 형태 국가들은 주로 히말라야의 낮은 구릉지대와 서북 인도 지역에 생겨났으며, 이중 샤키야, 콜리야, 말라 등은 단일 부족으로 이루어졌고 브리지스, 야다바스 등과 같은 여러 부족이 연합한 연합체 성격의 국가들도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말에는 마가다, 코살라, 밤사, 아반티 혹은 브리지스 등을 중심으로 하는 4국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인도사에서는 대개 16국 시대까지를 도시 국가의 단계로 보고, 4국 시대를 영역 국가시대라고 분류한다.

마가다 왕국의 발전
16개 국 중 마가다 왕국이 갠지스 강 주변의 평야를 장악하고 최강국이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지리적인 이점 덕분이다. 16국이 전쟁을 치르던 시기는 철기가 무기와 농기구에 사용되기 시작한 때이다. 마가다 지역은 철광석이 풍부한 지역이었으므로 철제 농기구와 철제 무기를 만드는데 수월했던 것이다.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대는 말과 마차 이외에 코끼리를 전투에 사용함으로써 군사력의 강세를 보였다. 또한 마가다 지역은 충적토로 기름진 평야 지역이다. 특별한 관개 시설 없이도 다양한 벼의 경작이 가능했다. 이를 바탕으로 상업과 교역도 활발했다. 

후기 베다 시대의 사회 조직-바르나제도
도시국가에서 영역국가로 통합되어가는 기원전 10세기~기원전 7세기를 인도 역사에서는 후기 베다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브라만․라자니야 혹은 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로 구분되는 4 바르나 제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구분에 따른 배척이 엄격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떠오른 것은 제사였다. 그것은 공공적 측면과 가정적 측면의 성격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공공의 제사의식에는 왕을 비롯하여 지역 공동사회-아직 많은 경우가 부족 단위와 일치함-전체가 참여하였다. 그리고 사적으로 거행되는 제사는 개인들이 자신의 가정에서 지냈다. 이것은 후기 베다 시대에 들어서서 베다 인들이 정착 생활을 하고 그에 따라 잘 정립된 가정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개인들은 제물을 아그니(불의 신)에게 바쳤고 그 제물 내용은 각각 그 제사 격식에 걸맞도록 바쳐졌다.


제사는 대규모적인 동물의 살생을 가져왔는데, 그중에서 특히 소의 도살이 심해 농경 생활에 가장 중요한 소의 축적에 큰 타격을 초래했다. 도살된 소는 식용으로도 사용되었으니, 당시에 쓰인 '손님'이란 존칭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고그나'로서 그 뜻은 '쇠고기 음식을 대접받은 자'를 말한다.  제사가 중요해지면서 브라만은 이제 신 그 자체보다 제사 의식을 통해 우주 만물의 섭리를 주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식 자체를 강조하는 이 같은 신앙을 브라만교라 한다. 브라만교에서 의례와 제사들이 발달하면서 브라만들의 경제적 특권과 지식 독점 현상이 심각해졌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기원전 6세기에 접어들면서 철제 농기구를 바탕으로 한 농경과 철제 무기에 의한 정복 전쟁이 더욱 활발히 일어났다. 이를 배경으로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계급의 영향력은 점차 커졌으나, 브라만의 제의 중심 성향은 여전히 변함없었으므로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브라만교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 우파니샤드이며, 자이나교와 불교는 새로운 사상이었다. 자이나교를 일으킨 바르다마나 마하비라와 불교를 일으킨 고타마 싯다르타는 모두 크샤트리아에 속하였으며 브라만의 권위를 배척하였다.
1) 우파니샤드
브라만교에 대한 반발로서 인간 내면의 진리를 탐구하는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게 되었다. 브라만 계급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서 개혁적 인사들은 복잡한 제사 의례를 거부하고,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진리가 있으니 누구든 수행을 통하여 이에 이를 수 있다’는 우파니샤드 철학을 주장했다. 신과 같은 외적인 절대자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유에 이를 수 있다는 우파니샤드를 통해 형식적이고 희생제를 위주로 한 행위주의에서 벗어나 진리를 탐구하는 새로운 생각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에서 '사색과 탐구'라는 생각의 전환이 바탕이 되어 육사외도와 불교, 자이나교 등의 신흥 사상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자이나교의 상징
2)자이나교
자이나교는 이원론을 근거로 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지바(jiva)와 아지바(ajiva)로 나뉜다. 지바가 물질의 업에 속박되어 있어서 현실의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 궁극적 해탈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행을 해야 한다. 불교는 엄격한 고행은 강조하지 않으나 지혜를 통한 해탈의 가능성은 공유한다.
자이나교에서는 베다의 가르침이나 의식과 규범은 배척하며, 해탈에 이르기 위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을 정하고 있다. 1. 언제나 어떠한 살생도 하지 말 것(Ahimsa) 2. 거짓말을 하지 말 것(Satya) 3. 자기 것이 아닌 것은 갖지 말 것 (Asteya) 4. 절제생활을 지킬 것(Brahmacharya) 5. 모든 집착을 버리는 것 (혹은 재산을 갖지 말 것) (Aparigraha). 진실만을 말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계율을 지키는 자이나교도들은 신뢰도가 높아서 금융업과 상인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다. 

3) 불교
흔히 불교라고 하면 윤회와 업을 연상하지만, 그것은 불교 이전에 힌두교의 전통적인 종교 관념이다. 석가 역시 윤회와 업의 개념을 불교 속에 받아 들였다. 그러나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유신교(다신교)였던 반면에 불교는 무신교였다. (부처는 신이 아니라 선각자일 뿐이다. 부처가 일종의 신과 같은 성격을 지니는 존재로 변하는 것은 후대에 대승불교의 발달로 불교가 체계적인 종단의 구조를 지니게 되면서부터이다.) 따라서 힌두교는 신을 윤회보다 상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불교는 신성(神性) 자체가 선행의 결과라고 보았다. (불교에서도 업을 전생의 결과물이라고 보지만, 현재의 모습 혹은 현재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출생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업에 대한 해석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이렇게 신의 개념을 부정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불교는 전통적인 카스트 제도도 부정했다. 하층 계급도 얼마든지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만민 평등 사상을 전개한 불교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종교였다. 
불교는 비(非)베다 지역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았고, 그곳을 개종을 위한 터로 삼았다. 대표적인 곳이 마가다 지역이었는데, 그곳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은 정통 브라만에 의해 경시되어 왔기 때문에 불교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TIP. 불교와 자이나교에서 불살생을 주장하는 경제적 배경
불교와 자이나교가 발생하게 된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동북부 인도에서 새롭게 형성된 농업경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 갠지스 강 중류 유역에서 형성된 발달된 농업 경제는 대규모의 소 사육을 필요로 하였지만 후기 베다시대로 갈수록 대규모화 된 제사는 엄청난 소의 손실을 가져왔다. 따라서 새로운 농업경제와 이를 바탕으로 도시 문화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소를 도살하는 제사가 반드시 중지되어야 했다.        
-󰡔세계의 역사󰡕

4) 불교와 자이나교를 지지한 상인들
기원전 6세기 붓다 시대에는 상업 중심지로 도시가 발달하였다. 도시의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 보호와 생산․유통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스레니(상업동업조합)를 결성했고, 스레니 대표들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경제적 능력의 상승과 사회적 차별이라는 부조화 속에서 바이샤 특히 경제력을 가진 가하파티나 세티들은 신분적인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계급 제도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자이나교와 불교가 주장하는 비폭력주의는 당시 끊임없이 지속된 전쟁을 종식시키고 상업과 교역을 진흥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한편 브라만 중심의 법전인 다르마수트라는 고리대금업을 비난하였고, 고리대금업자는 그들에게서 처벌을 받았다. 그러므로 상업과 교역의 성장으로 인해 대금업을 하던 바이샤들은 새로운 사상을 원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자이나교와 불교가 탄생하자 부유한 상인들은 지지를 보내고 경제적으로도 후원을 하였다. 상인 계층의 적극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교 경전에서는 상업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왕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상인들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왕들은 상인 세력의 대표에게 관리적 성격을 부여하여 이들을 국가 권력 내부로 끌어들이려 했다. 이 때문에 왕권과 상인 세력의 유대가 강화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상인 세력은 사회의 상층부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TIP. 불교의 경제관
불교에 의하면, 빈곤이라는 것은 증오심과 잔인성과 살생 행위를 낳는다. 이 모든 악을 일소하기 위해 붓다는 가르치기를, 농부는 곡물과 농경에 필요한 시설을, 상인은 재산을, 그리고 노동자는 임금을 반드시 지급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교육은 빈곤을 제거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불교는 나아가서 가령, 가난한 자가 승려에게 보시를 하면 다음 세상에서 부유하게 태어난다고도 하였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의 새로운 물질 생활에서 야기된 사회악을 완화시키려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채무자들은 상가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규칙은, 자연히 그들에게 굴레를 씌우고 있는 채권자와 사회의 부유층만을 위하는 결과가 되었다. 
비슷한 경우로, 노예들이 상가에 입단할 수 없다는 규칙도 노예들을 소유한 자들만 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과 규칙들은 물질 생활에서의 새로운 변화들을 깊이 고려하였고, 그것을 이념적으로 강화시켰던 것이다. 
-󰡔인도고대사󰡕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활동 결과
기원전 326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로 인식되었던 인도의 서북 지역으로 인도 정복에 나섰다. 이 시기 서북 인도는 군주국과 공화제 국가들이 난립하여 영토 확장을 위한 패권 다툼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기 때문에,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알렉산드로스 군대가 들어올 때에도 단합하여 대항 할 수 없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정복활동은 인도 서북 지역을 정치적 공백 상태를 만들었고 이 때문에 새로운 왕조, 마우리아가 탄생할 여백이 만들어졌다. 한편으로 지리적 시야가 넓어졌고, 무역과 해상 활동을 위한 교통로가 열림으로써 상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상과 문화적 교류도 활발해져서 로마 화폐를 모방한 화폐들이 만들어졌고, 그리스 건축 양식도 전래되어 장차 간다라 미술과 같이 본격적으로 두 문화가 융합될 계기가 만들어졌다.

마우리아 왕조의 통일
기원전 324년(혹은 313년) 마우리아 왕조는 마가다 왕국의 왕족이었던 찬드라 굽타가 일으켰다. 먼저 큰 세력이 없는 인더스 지역을 정복하고, 이어서 난다 왕조 마가다 왕국과 셀레우코스 왕조 지배하에 있던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차례로 정복했다. 그를 계승한 빈두사라(기원전 293~273년 재위)는 데칸 고원을 넘어 아라비아 해와 벵골만 사이의 중남부 인도까지 지배 영역을 넓혔다. 아소카 왕(재위 B.C. 269-232년)은 즉위 8년에 칼링가를 정복하고 인도의 동남부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이룩하였다. 

1) 찬드라굽타의 행정제도: 아르타샤스트라 (Arthasastra, 實利論)
아르타사스트라는 마우리아 초기 문헌 중 가장 중요한 사료이며 찬드라굽타의 재상 카우틸리아가 저자라고 알려져 있다. 아르타는 재산, 경제, 물질적 성공을 '샤스트라'는 '논(論)' 혹은 '전(典)'을 뜻하는 말로 왕자들의 교육과 행정․사법․외교 등 국가 통치에 관한 것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국가 경영론서이다. 

[사료] 아르타 샤스트라
- (왕의) 회초리 사용
철학과 베다학과 경제학을 보존하고 실현시키는 것은 회초리(danda, 권력 혹은 형벌)이다. 회초리를 사용하는 방법이 정치학이다. 회초리를 가혹하게 사용하는 왕은 공포의 대상이 되지만, 회초리를 잘 사용하면 백성들에게 법과 실리와 향락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만일 회초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물고기의 법칙(약육강식)을 야기시킨다. 왕이 회초리로 수호하면 네 개의 바르나와 삶의 네 주기(asrama)를 지키는 사람들은 본분에 충실하고 각각의 도를 지킨다. 

- 바르나에 근거한 차별적 법
브라만에게 악담을 한 경우 크샤트리아는 100파나, 바이샤는 150파나이 벌금형에 처하고 수드라는 체형(혀를 자름)을 받는다. 거꾸로 브라만이 악담을 한 경우, 대상이 크샤트리아이면 50파나, 바이샤이면 25파나, 수드라이면 12파나의 벌금형이다.    
-󰡔인도사 108장면󰡕


2) 불교를 통한 사상 통일과 다르마에 의한 통치
아소카는 칼링가 정복을 끝으로 전쟁 중단을 선언하고, 제국의 효율적 통치를 위한 제도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한 사상 통일의 기반으로 불교를 선택하고 다르마에 의한 통치를 선언하였다. 그래서 아소카는 '평등'을 주장하고 있는 불교를 내세워 '모든' 이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아소카의 비문에는 4개 바르나 대신 '모든 백성 (sava loka)'라는 말로 바꾸어 통일 제국의 모습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불교 전파에 많은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각 종교에 대해서는 관용 정책도 썼다. 무엇보다도 아소카의 다르마 정책의 핵심은 제사 금지에 있었다. 그는 불살생을 주창하면서 동물을 보호하는 것이 다르마의 정신 즉 법과 도리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제물 위주의 브라만교 제사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브라만들을 견제하는 정책이었다. 그리고 제사 금지의 정책을 확실하게 이행하는가를 감시하기 위해 정부 관리와 많은 첩보원을 두어 브라만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의 정책 시행 여부를 감시하였고, 그 정책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자는 심하게 처벌하였다. 아소카가 운영한 중앙 첩보 체제는 고대 세계에서 어떤 제국도 따라 오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조직이었다.


아소카 왕의 석주와 조칙이 새겨진 기둥
TIP. 아소카왕 석주-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의의
아소카 왕 당시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 역사는 아소카 왕이 세운 수많은 돌기둥과 그의 조칙을 새겨 넣은 바위, 동굴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석주는 30여 개 정도이다. 대부분 인도의 프라크리트어와 브라미 문자로 새겨져 있으나, 예외적으로 서북부 지역에서는 카슈로티 문자,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는 아람 문자와 그리스 문자도 있다. 석주의 머리 부분에는 사자나 황소 등 여러 동물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네 마리 사자가 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오늘날 인도의 화폐와 국기에 응용되고 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현 인도공화국은 단일한 국민국가 건설이 최대의 국가 과제다. 최초의 통일 군주 아소카가 각지에 세운 돌기둥의 머리를 국가 상징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3) 마우리아 왕조의 멸망
아소카 왕 사망 이후 제국은 붕괴하였다 멸망 원인은 다음과 같다. 아소카 이후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해산하지 않았다. 이는 다르마 정책의 시행을 감시하기 위해 조직된 첩보 체제와 더불어 막중한 비용을 유발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까지 포함한 넓은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러다 보니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고 이와 결부된 지방 관리들의 압제도 매우 심했다. 결국 민심은 이반되었고 제국 경제에는 위기가 왔다. 여기에 브라만들의 반발이 축적되었다. 또 하나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소카의 적극적인 문화 보급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갠지스 강 유역의 발달된 철기 분화는 제국 관리들에 의해 여러 지방에 보급되어 그곳의 물질문화를 발달시켰고 이는 곧 지방에서의 강력한 세력 형성과 직결되었다. 이런 시기에 중국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그로 인해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이 서북 변방을 자주 침입하면서 제국의 방어벽이 크게 흔들렸고 이내 뿌쉬야마뜨라 슝가에 의해 전복당했다.                                


쿠샨 왕조의 금화
쿠샨 왕조
마우리아 제국이 무너진 이후 인도는 제각기 다른 발전을 보였다. 그 중 그리스 계인 박트리아 인과 스키타이 계의 쿠샨 족이 두드러졌다. 쿠샨 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인도의 서북부에 이르는 대 제국을 세웠으며, 주변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하나로 융합하면서 인도 문화를 새롭게 변화시켰다. 3번째 왕인 카니슈카 때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인더스 강 유역의 푸르사푸라를 수도로 마가다 왕국을 비롯한 이웃 국가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쿠샨 왕조는 중국의 한 왕조, 서양의 로마와 같은 시기에 존속하였다. 이들은 서북 인도를 중심으로 하여 육로로 이란 지역(파르티아)을 거쳐 로마와 교역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인더스 강을 따라 홍해를 잇는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쿠샨 왕조는 인도와 지중해 세계를 연결하는 무역 활동을 주도하면서 로마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비단길의 주도권을 두고 한과 충돌하기도 했다. 대외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이 지역 처음으로 금화가 사용되었다. 로마는 경쟁하고 있던 파르티아 왕조를 배제하고 쿠샨 왕조를 통해 직접 중국과 교역하려 들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로마 금이 쿠샨 왕조로 유입되었다. 
쿠샨왕조는 불교를 받아들였다. 아마 이민족들이 아리아인 중심의 브라만교보다는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를 받아들이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카니슈카 왕 때 불경의 제4결집이 이루어졌고 이때 대승불교가 창시되었다.                                

안드라 왕조
안드라 왕조는 사타바하나가 원래 이름이며, 마우리아 제국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아소카 왕이 죽은 직후 독립 했다. 현재 안드라프라데시라는 주의 이름은 안드라 왕조에서 유래되었다. 브라만 중심의 국가였으나 불교도 성행하였다. 경제에서 해상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커서 스리 야즈나 사타카르니 왕은 주화에 배를 조각하기도 했다. 해상 무역과 상업의 중요성은 불교의 상인 세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브라만 국가를 자처하고 베다에 언급된 희생제를 지내는 안드라 왕조였지만 불교를 배척할 수는 없었다.
기원 후 2세기에는 데칸 반도를 횡단하고 인도양에서 아라비아해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대국을 이루었다. 사타바하나 왕조의 세력 확대와 강력한 국가의 형성으로 서북인도에 들어선 샤카, 쿠샨 왕조 등 외래 왕조의 남하가 저지되었던 셈이다. 안드라 왕조가 멸망한 것은 대략 기원 후 3세기로 추측된다. 이후 여러 지역으로 분열되었다가 굽타 왕조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모계제 풍속이 강했던 안드라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불상 제작과 간다라 미술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부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보리수, 가르침을 의미하는 수레바퀴(법륜), 사리를 모신 스투파 혹은 발자국이 부처와 같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대승 불교의 성립은 신앙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으로서 깨달은 자를 의미하던 붓다가 초월적 존재로 예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면서 붓다의 상이 조각이나 그림의 형상을 띠고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은 쿠샨 왕조의 중심지인 간다라 지방에 살던 그리스 인들의 예술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 지역의 불교도들은 그리스 인들이 자신의 신상을 만드는 간다라 불상의 전파(왼쪽부터 인도 간다라, 중국 룽먼, 한국 석굴암)
 방식으로 부처상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도의 불교와 그리스 문화가 결합하여 탄생한 예술 양식을 간다라 양식이라 한다. 


간다라 조각은 서북 인도의 기후 조건이나 환경 등의 영향으로 주로 흑색 편암으로 불상이 조각되었으며, 남쪽의 불상들과 비교하면 옷의 주름이 깊게 되어있다. 기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거의 동시대에 만들어진 마투라(Mathura)의 불상들은 헬레니즘 영향을 상당히 받아들인 간다라에 비하면 인도 토착적인 미술 양식으로 볼 수 있다. 기원후 2세기경 이후에는 마투라 미술에도 간다라 미술의 영향이 나타난다.
간다라 불상은 대체로 물결형의 긴 머리카락과 콧수염이 특징이다. 눈이 크고 아름다우며 검은 편암으로 조각되어있고, 마투라 불상은 머리카락이 없고 소라 모양의 육계에 눈은 부릅뜨고 입술은 두터우며 붉은색 사암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마투라 불상에도 간다라 양식이 나타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