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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서아시아 분석][페르시아 제국 분석][파르티아 왕조][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서아시아와 페르시아 제국 심층분석

by 9급일벌 2021. 1. 20.

목차

 

1. 들어가기

2. 서아시아와 페르시아제국

 

-페르시아의 명칭과 지리

 

페르시아 제국 이전의 이란 고원

1) 엘람 왕국

2) 아리안족의 이동과 새로운 왕국의 성립

3) 메디아 왕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기원전 550~330)

1) 키루스의 관용 정책

-TIP. 키루스 대왕의 종교적 관용 정책

2) 다리우스의 정책

[사료] 수사 궁전 준공 비문 -아케메네스 제국의 동원 능력

3) 경제 정책

-TIP. 파라다이스- 아케메네스 제국의 표상

 

아케메네스 제국 쇠퇴의 원인

 

페르시아의 미술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248~기원후 226)-분권과 공조의 시대

1) 정치

-TIP. 파르티아와 동서 교역

2) 파르티아의 문화

사산조 페르시아(기원후 226~651)

1) 사산조 페르시아의 통치 정책

-TIP. 호스로우 1세의 개혁

2) 사산조의 사회

3) 문화

조로아스터교

 

3. 참고문헌

 

 

1. 들어가기

서아시아 지역은 사방으로 열려있는 지리적 개방성으로 인해 언어와 종교, 문화가 다른 많은 민족들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 매우 복잡한 정치 상황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에 이들은 페르시아라는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어 200여 년간 통합을 유지하였다. 그 전에도 통일 제국은 존재했으나 페르시아만큼 성공적으로 제국을 유지하지는 못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다양한 집단들을 하나로 유지하는 정책을 발전시켰고, 그 통치 방식은 이후 대 제국을 세우는 여러 국가와 민족들에게 계승되었다. 


피정복민에 대한 관용정책과 국가를 통합하는 도로 건설로 전설적인 제국의 명성을 얻고 있지만, 정작 페르시아 제국 자체에 대해 일반인들이나 학생들이 아는 바는 거의 없다. 오히려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그리스를 괴롭힌 냉혹한 전제 군주의 나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렇게 된 원인은 페르시아에 대한 시각이 주로 고대 그리스인의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교 현장에서도 서아시아는 아프리카나 인도와 마찬가지로 주변부였기 때문에 페르시아에 인식은 그리 높지 못한 편이었다. 


교육과정이 계속 개정되면서 세계 역사에서는 문화 간의 혹은 문명 간의 상호 교류와 연계성에 대해 많이 강조한다. 서양과 동양의 접점으로 어느 지역이나 민족보다도 교류와 전파의 역할을 많이 하였고, 인류 문화의 발전에 충실히 기여했던 곳은 세 대륙이 만나는 서아시아였다. 그런 면에서 최근 이슬람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노력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러한 관심의 폭을 더 넓혀 현재 이슬람 세계의 뿌리로서 이슬람세계 바로 직전까지 존재했던 페르시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할 것이다. 


이 주제에서는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 종교 등에 대한 내용을 주로 서술하였다. 새로운 시각을 필요로 할 정도로 일상 속에서 페르시아 문화를 자주 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은 페르시아에 대해 알아보는 것 그 자체가 새로운 것이다. 궁전과 황금의 화려함, 전제군주의 엄격함과 냉혹함이라는 이미지를 걷어내고, 역사적 실체로서 알아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페르시아 제국 쇠퇴의 원인도 살펴봄으로써 사상과 종교의 통일이 제국의 유지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2. 서아시아와 페르시아제국

페르시아의 명칭과 지리
원래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이란 지역을 '파르스' 또는 '파르사'라고 불렀는데,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들이 자기들 말로 바꾸어 '페르시스'라고 불렀다. 파르스라는 이름은 현재 이란의 한 주의 명칭으로 남아있다. 이란이라고 부른 것은 서기 3세기 사산 왕조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642년 사산 왕조가 멸망하여 이 명칭도 잊혀졌다가, 1934년 팔라비 왕조의 레자 샤 왕 치하에서 다시 이란이라는 명칭을 되찾게 되었다.
지리면에서는 이란 지역은 분지와 저지대가 딸린 거대한 고원 지대로서 중앙아시아의 트랜스옥시아나(현재 아랄 해 인근 지역) 평원과 파키스탄의 펀잡 지역 그리고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은 카스피해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초원과 평원으로 연결된다. 이곳은 강수량이 아주 적은 지역으로 드넓은 사막과 황야가 특징이다. 규칙적으로 비가 내리는 곳은 카스피해 근처의 북쪽 산악지대뿐이다. 
동과 서를 잇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이란고원은 오랜 옛날부터 사막 유목민들의 약탈 대상지역이 되었으며, 이곳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페르시아 제국 이전의 이란 고원  
1) 엘람 왕국 
아리아인이 오기 전 이곳에는 엘람(약 기원전 3,000~ 기원전 639년)이라는 왕국이 있었다. 현재 엘람에 관한 역사적 내용은 성서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석비와 점토판 등에 의존하고 있다. 종교적인 부분에서 뱀을 숭배하는 것을 제외하고 메소포타미아와 매우 흡사하였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농업을 주로 하였던 반면 엘람 왕국은 광물질과 지하자원을 수출하는 무역을 경제의 근간으로 삼았다. 초가잔빌에 건설한 지구라트가 지금도 남아있다. 

2) 아리안족의 이동과 새로운 왕국의 성립
기원전 1700년경 인도유럽어족인 아리아인이 이동하여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정착 농경생활로 전환하였다. 원주민들로부터 땅속에서 물을 끌어 쓰고 수로를 만드는 관개 기술을 배웠고, 스스로 카나트(Qanat)라는 지하 수로를 발명했다. 또 말안장을 사용하여 더 빠르고 편하게 말을 탈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뛰어난 승마 기술로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냈다. 


서아시아의 정치적 변화
3) 메디아 왕조
이란-아리안족을 구성하는 가장 큰 종족은 메디아족과 페르시아족이다.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살았던 이들은 만나이라는 연합체를 형성, 기원전 8세기에 메디아 왕조를 세운 뒤, 여러 부족들을 연합하고, 신 바빌로니아의 지원을 받아 기원전 612년에 아시리아를 함락시켰다. 
메디아는 엑바타나를 수도로 하여 사트라피 체제(속주령 체제)로 영토를 운영했다. 전설에 의하면 지방 세력인 안샨의 영주와 메디아 왕의 딸이 결혼하여 태어난 아들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건국자인 키루스 대왕이라고 한다. 아리아인은 원래 유목민이므로 이동생활을 하여 성벽을 견고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견고한 성벽과 성, 집을 짓고 경비병을 두었다. 사트라피 체제와 함께 메디아의 건축 양식은 아케메네스 왕조로 이어졌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기원전 550년~330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왕조에 대한 기록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현재 대부분의 사료를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고 그 외에 당시의 건축물과 부조물에 새겨진 글씨, 미술품들, 왕들이 남긴 석비와 이집트 파피루스 그리고 구약성경을 통해서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고 있다. 그중 페르세폴리스를 통해 그나마 많은 정보를 얻고 있다. 

아케메네스 왕조와 현재 이란의 영역
1) 키루스의 관용 정책
아케메네스의 통치 정책은 키루스와 다리우스 시기에 시기에 확립되었다. 키루스는 새로운 왕국을 정복하면, 그곳의 통치자를 내쫓되 그의 목숨을 뺏지 않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장해주고, 그 대신 주 혹은 군을 다스리는 총독인 사트라프를 세웠다. 사트라프는 대부분 페르시아 귀족이었다. 하지만 키루스는 사트라프 치하의 백성들에게는 거의 간섭하지 않고 그들 고유의 신들과 다양한 문화를 누릴 수 있게 했다. 정복지의 고위 관리들이 아케메네스 치하에서 관직을 유지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TIP. 키루스 대왕의 종교적 관용 정책
어떤 면에서 보면, 고대 세계의 종교는 다신 숭배였으므로 통치자들이 다신 숭배를 허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유대교나 기독교의 경우와는 달리 고대 근동 지역의 종교들은 혼합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종교들은 각각의 도시, 백성, 그리고 생활 영역을 보호하는 여러 신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키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바빌로니아에 입성하자마자, 그곳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마르두크 신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는 자신이 바빌로니아 백성들의 신 마르두크의 선택과 도움을 받는 해방자인 것처럼 처신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역사학자들 대부분은 키루스가 사용했던 관용정책이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전략과 편법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키루스는 해당지역의 신(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 유대의 여호와)을 포용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고, 해당 지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함으로써 피정복민의 저항과 반란 가능성을 줄였다.
-󰡔제국의 미래󰡕

2) 다리우스의 정책
다리우스도 키루스와 마찬가지로 피정복민에게 종교적 관용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각 지역의 사회구조를 대부분 그대로 두고, 그 지역의 법률을 성문화하고 집행에 옮기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다리우스는 이집트 재판관들이 내린 결정을 지지하고 보증했을 뿐 아니라 토라를 이스라엘의 법률로 인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루스와 다리우스가 이런 관용적인 정책으로 얻은 이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피정복민들을 죽이거나 ‘페르시아화’ 하는 데 자원을 낭비하지 않았고, 그들이 가진 다양한 기술과 재능, 자원을 활용하였다. 이는 다양한 민족출신들로 구성된 페르시아의 군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다리우스가 세계제국의 왕중왕을 자처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사료] 수사 궁전 준공 비문 -아케메네스 제국의 동원 능력
"내가 수사에 짓게 한 궁전의 재료들은 멀리서 가져온 것들이다. 우선 원래의 지반이 나올 때까지 흙을 깊숙이 팠다. … 이 자갈 더미 위에 궁전을 지었다. 땅을 파고 자갈을 붓고 점토 벽돌에 색깔을 칠한 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이었다. 히말라야삼나무로 만든 들보는 레바논 산맥에서 가져왔는데, 시리아인들이 이 목재를 바빌론까지 날랐고, 바빌론에서부터는 카러인과 이오니아인이 뗏목으로 수사까지 운반했다. 야카 목재는 간다라와 키르만에서 가져왔다. 궁전의 건축에 사용된 황금은 리디아와 박트리아에서 제공하였고, 청금석과 홍옥수 같은 보석들은 소그디아나에서 가져왔다. 터키옥은 코라스미아, 은과 흑단은 이집트, 테라스의 벽에 쓰인 염료는 이오니아, 상아는 누비아와 신드, 그리고 아르카코시아에서 들여왔다. … 여기 쓰인 석주들은 엘람의 아비라두스라는 마을에서 가져왔다. 석공들은 이오니아와 리디아 출신이었고, 금 세공사들은 메디아와 이집트인들이었다. 목재는 리디아와 이집트인들이 깎았고, 벽돌은 바빌로니아 인들이 구웠으며, 테라스 벽을 칠한 것은 메디아와 이집트인들이었다.                                                                 -󰡔임페리움󰡕


다리우스 1세 때의 금화
2) 경제 정책
경제 시스템은 농업과 무역을 기본으로 세워졌다. 다리우스는 이 두 가지 영역을 직접 관리하였다. 농업 생산을 위해 관개시설을 개선하고 카나트라는 지하수로를 만들었다. 수 킬로미터 길이의 지하 운하를 통해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메마른 평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지칠 줄 모르는 노동과 잘 조직된 행정 체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물이 부족한 고원 지대에 살았던 페르시아 인들은 수자원을 성공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농업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고, 그것은 곧 페르시아 부의 밑거름이 되었다. 
무역을 위해 금화와 은화를 주조하고 화폐 사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각 지역의 세금이나 군인과 궁정 대신들의 급여를 화폐로 지급하고 물품 거래에도 반드시 은화나 금화로 결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개혁의 결과 모든 제국이 유기적으로 상호 교류하면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외에 새로운 시장과 자원을 찾기 위해 지원하여 이집트에서는 운하를, 페르시아 해안가에는 항구를 만들도록 독려하였다. 또한 도량형을 통일하여 경제 활동 활성화에 기여했다. 제국의 수입이 늘어나면서 귀족들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삶도 부유해지면서 당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TIP. 파라다이스- 아케메네스 제국의 표상
파라다이스는 원래 페르시아어이다.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실 정원과 유원지를 'pairidaeza'라고 불렀고, 구약을 번역했던 그리스 번역자들은 에덴동산과 내세를 뜻하는 말로 이 단어를  썼는데, 이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파라다이스가 인간이 지상에 복제해온 천국 가운데 가장 천국에 가까움을 암시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파라다이스의 보고에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온갖 열매들을 맺는 나무들과, 리비아나 인도에서 가져온 몹시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곳에는 또한 파르티아의 낙타, 아시리아의 양, 아르메니아의 말, 카파도키아의 노래, 왕국의 전역에서 잡아온 사나운 사자와 황소, 그리고 들짐승에 이르기까지 파라다이스는 보통 정원이 아니라 원예실험 단지, 동물원, 그리고 사냥터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파라다이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전체의 현황을 드러내는 생생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제국의 미래󰡕 

아케메네스 제국 쇠퇴의 원인
왕조 후기 크세르크세스 1세를 비롯한 페르시아 통치자들의 불관용성이 강해짐에 따라 각 지역의 반발이 커지면서 정치적 불안정도 커졌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키루스와 다리우스가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관용이 후일에 싹틀 불관용의 씨앗을 뿌려놓았다는 점이다. 제국이 팽창함에 따라 병합되는 민족과 문화의 수는 크게 늘었지만, 이들 민족과 문화는 페르시아 대군주 밑에서 여전히 별개의 공동체를 유지했다. 페르시아제국은 군사적으로는 통합되었지만, 현대 국가들과 같은 지배적인 정치적 정체성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급속히 뻗어나가는 제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종교나 언어 또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에는 다양한 민족들의 마음을 움직여 공동의 규범을 옹호하게 할 만한 특성이 없었다.



페르시아의 미술 
페르시아인은 정복한 영역의 다양한 문화를 폭넓게 흡수했다. 이 시기의 건축과 조소는 메소포타미아 예술 전통을 계승함과 동시에 이집트, 그리스의 요소들도 흡수했다.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거대한 석조 토대 위에 건설되어 궁전에 석주가 많다. 페르세폴리스 왕궁의 다리우스 접견실처럼 밀집된 석주를 특징으로 하는 건축 형태는 이집트 신전의 다주식(多柱式)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궁전은 매우 호화롭고 대부분 부조로 장식되어 있는데 주로 예배, 조공, 의식과 같은 역사적, 종교적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아시리아 부조의 호방하고 거친 스타일과 비교해 볼 때, 페르시아 부조는 한층 더 평화롭고 근엄하며 장식성이 뛰어나다. 각인된 인물과 동물의 형상은 거의 모두 측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인물의 머리는 측면을, 어깨는 정면, 하체는 측면을 보이는 이집트 부조의 형식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아케메네스 왕조 기간 동안 만들어진 돌 비문들은 비스툰과, 낙쉐로스탐, 수사에서 발견되었으며 당시 사용되던 그릇들과 석상 위에도 글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외에도 현재까지 금, 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동전과 무기, 술잔, 그릇, 저울과 석상들이 발견되었다. 


파르티아의 영역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248년~기원후 226년)-분권과 공조의 시대
이란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살았던 파르티아족은 유목 생활을 계속하여 정착하지 않았다. 민첩하고 용맹한 민족으로 알려진 이들은 기마전투와 활쏘기로 유명했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부족이 팔라비라는 부족이었다. 팔라비족의 아슈크 장군은 기원전 248년 셀레우코스 왕조에 반기를 들었고, 많은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파르티아 제국이 설립된 시기로 보고 있다. 파르티아 왕조는 아케메네스 왕조나 사산 왕조 보다 오랫동안 유지되었지만 오히려 남아 있는 사료들은 적다. 

1) 정치
메흐르더드 2세(미트라다테스, 기원전 88-23년)의 통치기를 황금기로 보고 있다. 그는 동으로는 중국과 인도에서부터 서로는 로마 제국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으며, 다시 왕중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중국, 로마와 외교를 맺고 이란을 통과하는 길로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이 길은 후에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파르티아 제국은 지방 분권적 정치 체제였다. 후계자 선정이나 정복 전쟁 같은 국가의 중요한 일은 귀족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이 회의는 종교 지도자, 왕족, 지방 영주, 그리고 군대 사령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넓은 토지를 소유하였으며, 지지 세력과 많은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간의 권력 투쟁과 갈등이 심해져 나라 전체가 혼란해졌다. 결국 파르티아는 지방 영주들의 반란으로 멸망하게 된다. 
또한 외부의 위협도 커졌다. 동쪽으로는 늘어나는 유목민과 인도 쿠샨 왕조의 위협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서쪽으로는 로마가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지속적인 팽창정책을 고수했다. 로마의 정책은 파르티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었고, 이 갈등은 사산조 제국까지 약 700년 간 계속되었다.                                -󰡔고대 페르시아의 역사󰡕

TIP. 파르티아와 동․서 교역
후한 반초 장군이 휘하 장수인 감영에게 대진(로마)까지 진출하라는 임무를 주었는데, 감영은 임무 수행을 위해 파르티아의 영토를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파르티아인은 중국과 로마 간에 직접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감영의 로마 제국 방문 계획을 방해하기 위한 계략을 꾸몄는데, “저 바다는 엄청나게 먼 길입니다. 순풍이 분다 해도 되돌아오려면 세 달이나 걸립니다. 만약에 역풍이라도 불라치면 2년은 족히 걸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뱃길을 떠나려면 3년 치 식량을 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 있으면 향수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 병은 많은 병사를 죽음으로 이끌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파르티아인의 속임수에 넘어간 감영은 로마 제국을 목전에 두고 중도에서 포기하고 중국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세계사 수업󰡕1

2) 파르티아의 문화
파르티아 제국은 귀족 사이에는 그리스의 문화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그리스 문화가 침투하지 못했기 때문에 파르티아 초기에 만들어진 서민층의 유물에서는 당시 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 제국 말기로 갈수록 반 헬레니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예를 들면 동전의 경우 초기에는 그리스처럼 얼굴의 옆면 반쪽만 나오는 스타일이었으나 점차 정면으로 얼굴 전체가 나오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파르티아의 유물이 많지 않다. 최근에 발견된 예술품 중에는 상아에 새겨진 물품이 많았다. 상아로 무기와 그릇, 물병을 만들고 그 위에 아름다운 문양과 그림을 새겨 넣었다.

사산조 페르시아(기원후 226년~651년)
1) 사산조 페르시아의 통치 정책
사산조는 아케메네스의 계승자를 주장하였으므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제국 운영 정책을 복원하고 따랐다. 정치, 경제, 사회, 농업 등의 부분에 각각의 책임자가 있어서 각 영역을 관리했다. 이들의 수장으로 총리가 있었다. 각 지방과 도시들은 각각 그 지역을 책임지는 행정관을 두었으며 이들이 각 도시를 다스렸다. 그러나 로마와 벌인 지속적인 전쟁은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누리던 경제적 이익을 상실하게 했고, 기득권층이 된 모베드(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배타성은 사회 문제를 개혁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호스로우 1세(재위 531~579년)의 개혁 정책으로 잠시 안정을 누렸으나 그가 죽은 후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과 로마․아랍․투르크의 압력 등으로 불안이 높아졌다. 결국 632년 아랍 이슬람세력의 공격을 받아 패하고 다음해 수도를 점령당했다. 그러나 제국 운영 방식을 비롯한 사산조의 많은 전통들이 이슬람-이란으로 지속되었으며 높은 문화적 수준은 이슬람 문화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TIP. 호스로우 1세의 개혁
집권 초기에 비잔티움과 평화조약을 맺어 안정을 도모한 뒤, 조세제도를 개혁하였다. 그 동안 토지세로 각 토지에서 산출 물품으로 바쳤던 것을 일괄적으로 현금으로 납부하도록 하였다. 인두세는 성직자, 전사, 궁정 대신들은 예외였으며 일반 평민 중에서도 20-50세 사이의 사람에게만 징수하였다. 사산조 시대의 최대 세금 징수 지역은 가장 비옥한 토지인 메소포타미아 평야였다. 이슬람 제국을 건설했던 압바스 왕조도 호스로우 1세의 조세 제도를 본떠 활용하였다.                                               -󰡔고대 페르시아의 역사󰡕

2) 사산조의 사회
사산조 페르시아의 사회는 세 계층으로 구분되었다. 고위층에는 귀족과 장군들을 포함한 통치 계급, 중간층에는 종교지도자들과 학자들 그리고 하층에는 농민, 장인 등 평민 계층이 있었다. 계층의 구분이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엄격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동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최고 사제를 모베드-모베던(Mobed-Mobedan) 즉 '사제 중의 사제'라고 불렀다. 그는 종교적 법률 해석을 내리거나 왕위를 결정하는 것 등 중요한 국사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교육, 결혼, 예배 의식의 참여, 축제와 애도식 등 모든 일이 조로아스트교의 규례와 전통에 따라 진행되었다. 
사산 왕조는 농부를 비롯한 하층민의 피와 왕족․귀족의 피는 원천적으로 달라서 태어난 핏줄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고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사회 체제를 그렇게 만들어갔다.

3) 문화
사산조 시대에는 귀족의 자제들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주로 사산조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 경전 󰡔아베스타󰡕를 공부 했으며 이 외에도 활쏘기와 초건(폴로), 수영 등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 이것들은 전쟁 시 사용할 수 있는 것들로 모든 배움의 기초였다.
건축에서는 새로운 양식 즉 돔 형식의 여러 형태의 지붕과 독특한 에이번을 사용해 궁을 지음으로써 기둥 사용을 줄이는 기술을 사용했다. 또한 벽과 지붕이 맞닿는 곳에 화려한 장식을 넣고 타일을 사용하여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티스푼궁과 피루즈어버드 궁이 당시의 아름다운 건축술을 간직하고 있어 유명하다. 
산업분야에서는 수제 카펫과 옷감, 금속과 유리를 이용한 제품이 번성했다. 특히 금속제품은 금과 은으로 세공된 세련된 그릇들이 만들어졌다.

조로아스터교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시기에 생겨난 조로아스터교는 창시자의 이름을 딴 종교이다.(페르시아 이름인
호스로우 1세의 사냥모습을 새긴 은제 접시
 짜라투스트라의 그리스식 호칭)였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전의 종교보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성을 높이 샀으며, 내용의 보편성은 세계 제국 페르시아의 질서를 잡는 또 다른 기둥이 되었다. 한편 조로아스터교의 교리 중에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구세주 등의 내용은 서아시아에서 태어난 유대교와 크리스트교,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멀리 인도의 대승 불교 같은 세계 종교에 영향을 끼쳤다. 

아후라마즈다를 숭배하는 페르시아의 왕
조로아스터교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한 분의 참 신이 있는데, 그가 바로 아후라 마즈다로서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다. 조로아스터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당시 사람들이 섬기던 다른 잡신은 모두 거짓 신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세상은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이 싸우는 대 쟁투의 현장이다. 인간은 이 두 세력 중에서 어느 한 쪽에 가담해야 한다. 결국 이런 이분법적 양자택일에서 어떤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
사람이 죽으면 천사 미트라가 우리의 지난 행위를 저울에 올려놓고 심판을 한다. 악 쪽으로 기울면 그 영혼은 지옥으로 가고, 약간이라도 선한 쪽으로 기울면 그 영혼은 낙원으로 간다. 낙원과 지옥에 간 영혼은 거기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아후라 마즈다가 예정해 놓은 세상 끝에 이르면 그는 이 세상을 완전히 쓸어서 창조 때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해 놓는다. 이때 영혼들이 부활을 하고, 악한 영혼은 순화되어 선한 영혼과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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