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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유목민의 생활과 유목국가의 특성 심층분석

by 9급일벌 2021. 1. 20.

목차

 

1. 들어가기

2. 유목민의 생활과 유목국가의 특성

 

1)유목민의 삶의 터전 텐산 초원

2)삶의 터전, 초원

3)유목민의 생활

4)유목사회의 경제 활동

5)유목사회와 정주사회의 관계

6)부족연합체

7)유목군주의 역할

8)초원지대의 유목국가들

-1) 스키타이

-2) 흉노

-3) 유연과 선비

-4) 돌궐

-5) 위구르

 

9)유목국가의 세계관

 

3. 참고문헌

 

 

1. 들어가기

영화 뮬란에서 뮬란 측 인간은 귀엽고 훈훈한 인간미를 갖고 있는데 비해, 적들 즉 훈족은 유령처럼 죽음의 빛으로 채색되어 있다. 훈족에 대한 부당한 편견은 정착문명의 역사가가 저질러온 잘못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유목민과 유목사회, 그리고 그들의 중추가 된 유목국가는 인류사에서 그들이 수행한 역할에 비하여 격하되어 왔다. 문자의존도가 매우 미약한 유목민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중국을 비롯한 정착민에 의하여 쓰였기 때문에, 실제로 기록된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기록된 것조차도 오해와 곡필이 많았다. 기록자는 문명인, 유목민은 야만족, 약탈자와 비문명으로 취급되었다. 유라시아 유목민의 행적은 주로 중국사가의 눈으로 관찰되었는데, 흉노는 시끄러운 놈, 유연은 뭉글어지고 거친 벌레, 돌궐은 날뛰는 무리들, 몽골은 아둔한 옛 것 등 무자비한 문자의 폭력으로 일관되어왔다. 게다가 역사는 오직 공간만을 중심에 놓고 관찰되어왔기 때문에 정주사회가 아닌 유목사회의 실체는 오랫동안 경시되어 왔다.
유목민과 유목국가는 역사 속에서 인류사를 이끌어온 한 주체로서 우리에게 풍요로운 유산을 물려주었는데, 초원에서 유목국가를 건설했던 스키타이, 흉노, 돌궐, 위구르, 거란, 몽골족 등이 그 주역이었다.
본 주제는 유라시아의 북쪽 드넓은 초원을 터전으로 삼아 유목생활을 영위하였던 사회의 경제 구조, 정치․군사적 특성과 유목민의 역사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세계사의 또 다른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유목민과 유목국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설정되었다.


2. 유목민의 생활과 유목국가의 특성

유목민의 삶의 터전 텐산 초원
삶의 터전, 초원
유라시아 대륙 북부의 대삼림 지대의 남쪽 중앙부에는 건조한 초원지대가 가로놓여 있다. 초원지대는 동으로는 몽골고원으로부터 서쪽으로 준가리아 분지, 키르기스, 아랄해, 카스피해, 흑해의 북쪽 즉, 우크라이나, 그리고 폴란드․헝가리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이곳이 바로 풍부한 목초지가 펼쳐져 있는 유목민의 세계였다. 초원지대 남쪽으로는 사막이 가로놓여 있고, 그 안 곳곳에 오아시스가 흩어져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과 카라쿰․키질쿰 사막을 흘러 아랄 해로 흘러 들어가는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강 유역에도 오아시스가 형성되어 있다. 초원과 사막으로 뒤덮여 있는 건조지대, 특히 초원은 오랜 동안 유목민의 삶의 터전이었다.
 
유목민의 생활
초원지대는 여름이 짧고 강수량이 적어 건조하며, 겨울은 춥고 길어 농사짓기에 적당하지 않아 주요한 생활 활동은 유목이며 부업으로 수렵을 하기도 한다. 유목은 목축민이 무리 생활을 하는 습성을 가진 양이나 산양, 말․소․낙타의 떼를 방목하면서 주거․가재와 함께 이동하는 생활 형태이다. 유목은 고정된 주거지나 축사를 갖지 않고 그 사회의 성원 대다수가 광역적이며 계절적 이동을 통해 가축을 사육함으로써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식량 생산의 특수한 형태이다. 유목민은 풀을 따라 1년을 이동하며 산다.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라 정확한 계절이동이다. 겨울 영지와 여름 영지 사이의 이동 경로도 거의 결정되어 있다. 요소요소에 우물이 설치되고 목초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이동과 설치를 반복하는 중에 가축들, 특히 주요한 가축인 양들은 봄의 출산으로부터 여름의 비육, 가을부터 겨울에 걸친 도축과 임신도 정해진 순서에 의해 관리될 만큼 조직적이다.
계속적인 이동생활은 자유민으로서의 긍지를 고취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인내와 규율 그리고 강인한 신체를 부여해 주었다. 수렵은 좋은 군사훈련의 기회였으며, 이동생활은 기동성과 기마술, 그리고 부족적 결속력의 강고함에 바탕을 둔 집단적 규율을 부여하였다. 


유목사회의 경제 활동
유목사회는 이론적으로 자급자족적이라 할 수 있다. 가축들의 주종을 이루는 다섯 가지, 양․말․소․염소․낙타로부터 추출되는 생산물이 유목민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가축의 젖과 피․고기를 주식으로 하고, 가축의 가죽과 털로써 옷을 해 입고 또 펠트와 카페트를 만들어 텐트의 안팎을 장식했다. 
그러나 많은 유목민들은 육류나 유제품 외에도 인간의 정상적인 활동을 위해 필요한 곡물과 채소를 섭취해야 했고, 또한 가정생활에 필요한 일상용품들, 전쟁 때 필요한 무기류, 기타 사치품을 소유하려 하였다. 이러한 물품들은 초원 너머의 정주지대로부터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처럼 유목경제는 비자급자족적일 뿐 아니라 불안정성도 가지고 있었다. 유목민에게 가장 기본적인 재산인 가축은 질병․약탈․자연재해에 매우 취약하였고, 다른 형태의 재화의 축적도 이동생활을 저해하였다.
반면, 끝없는 부의 증식이 불가능한 것처럼 절대빈곤도 사회적으로 통제되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축을 소유하지 못한 유목민에게 부유한 유목민은 가축을 대여하거나 줌으로써 유목사회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유목 사회에서는 유난히 관용의 미덕을 강조하였다. 유목사회는 정주사회에 비해 재산의 불균등화나 계층 분화의 현상이 덜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목사회와 정주사회의 관계
유목경제는 정주 농경지역에 대한 의존이 불가피하였던 것처럼, 정주사회 역시 유목생산물, 예를 들어 군마, 축육(畜肉) 등을 필요로는 했지만 유목사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의존성이 낮았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유목사회가 정주사회의 존재를 거의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유목민이 정주사회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었다. 외부로부터 획득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평화적인 것이 교환이었고, 이는 변시(邊市)와 대상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정치적 상황의 변화나 중국 측의 정책변경에 의해 중단될 경우에는 폭력에 의존했는데 약탈과 정복이었다. 약탈은 직접적이고 손쉬운 물자획득 방법이기는 하였지만 일회적․단기적이라는 약점이 갖고 있고, 정복은 막대한 물량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줄 수는 있지만 정주국가를 붕괴시킨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양자의 약점을 보안한 것이 정주국가로부터 정기적인 공납을 수취하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유목국가와 정주국가와의 관계는 공납-약탈-정복이라는 여러 가지 형태를 띠는데, 서로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부족연합체
가축의 사육은 1호(천막 가옥)가 단독으로 방목하기보다는 이웃과 협력하여 4~6호가 하나의 둔영을 이루었다. 1호가 20~30마리의 양을 기르는 데는 상당히 넓은 방목지가 필요 하였으므로 유목사회에서 둔영과 둔영 사이의 거리는 농경사회의 촌락간의 거리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멀다. 인구밀도는 적고 유목민의 고립화 현상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고립된 유목사회가 내부적 결속을 다지고 부족으로 발전하고 다시 부족들이 연합된 부족연합체를 형성하면서 유목국가로 발전하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자연의 재해에 의한 가축의 떼죽음이 가져다주는 식량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식량약탈에 나설 때, 그리고 약탈을 당하는 경우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한 공동방어가 필요할 때 부족적 단결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씨족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위기가 장기화되면서 유목민의 단결력도 강화되고 부족사회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사․정치적 능력이 있는 부족장이 나타나 여러 부족을 통합하게 되고 유목국가의 출현을 가져오게 된다.


부족연합체는 유목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적 특징으로, 유목경제를 영위하는 부족들의 연합을 바탕으로 구성된 하나의 통일적 정치적 결합체이다. 흉노왕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흉노왕국은 선우를 권력의 정점으로 하고 그 아래 특정한 씨족이 독점하는 24대 관직이 있다. 선우는 군장으로서 국내의 모든 부족을 통치함과 동시에 국가의 제사를 주재하였다. 이와 같은 큰 제사를 통하여 부족의 단합을 꾀함과 동시에 선우의 주재 아래 부족장 회의를 개최하고 국가의 정치를 원활히 집행해 갔다. 이를 통하여 절대권을 행사하였다. 군주라는 지위의 획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격은 용감성과 군사적 지도력이었다. 


선우는 부족장과 귀족의 협의에 의해 선출되고 왕권이 강화되면 세습되기도 하였다. 이런 권력 구조는 이후 등장하는 유목국가에서는 물론 정복왕조 출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유목국가의 지배체제는 유목국가의 부족연합적 성격과 잘 맞도록 외형상 대체로 삼분구조를 보여준다. 군주가 통합하는 중부의 선우, 좌현왕과 우현왕으로 본거지가 나누어졌으며, 그 아래 24장이 있는데 모두 만기(萬騎)라 불렀으며, 천장(千長), 백장(百長), 십장(十長), 그 외에도 각 부족․씨족의 수령들이 포함된다. 24장들은 자기 휘하의 유목집단에 대해 정치적 복속의 표현이자 제국 운영에 필요한 최소 요건인 공납과 병력을 징발하고, 전쟁과 약탈시 군주의 명령에 따라 자신이 통솔하는 집단으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였다.  
                    
유목군주의 역할
유목군주에게는 두 가지 역할이 있었다. 하나는 각 부족 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일이다. 유목사회의 분쟁은 유목지의 우선적 사용권이라든가 가축과 목축민의 약탈과 같은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하였다. 이러한 부족 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 정기적으로 ‘집회’가 열렸고, 일 년에 한번은 성지로 생각하는 곳에 모여 대집회를 개최하였다. 몽골제국의 쿠릴타이도 유목국가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대집회였다. 
나아가 유목군주는 공물의 납부와 병사의 조달을 요구하였다. 예를 들어 목축민의 경우에는 그들의 주된 생산물인 가축을 공물로 바쳤던 반면, 강제 이주된 정주민들은 식량과 기타 생활 공구류를 제공하였고, 삼림・초원지역의 주민들은 모피나 철과 같은 특산물을 납부하였다. 유목군사도 차출했는데 병사의 차출과 지휘를 원활히 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십진제를 실시하였다. 흉노의 십장․백장․천장이 그것이다. 
유목군주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업무는 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의 제공이었고, 군주는 재화의 축적자이기보다는 분배자의 기능을 하였다. 돌궐의 퀼테킨 비문에는 이 같은 분배자로서의 유목군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투르크인들이여, 너희들은 스스로 배부르다고 생각하고 있다. 배고픔과 배부름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배부르게 되면 배고픔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을 먹여 살린 카간의 말을 듣지도 않고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너희들은 모두 거기서 파멸하고 사라져 버렸다. 하늘이 명령하였기 때문에 또 내가 (하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카간이 되었노라. 카간이 되어 없고 가난한 백성들을 모두 모았도다. 없는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고, 적은 (수의) 사람을 많게 하였도다. 혹시 나의 이 말에 틀린 곳이 있더냐. 오, 투르크인들이여, 이 말을 들으라.”                              
유목군주가 ‘헐벗고 배고픈 유목민’을 만족시켜 주는 것은 교역과 약탈, 공납이었다. 그래서 군주는 사신의 파견과 전쟁을 주도하였으며, 획득된 물자의 재분배 또한 장악하였다. 이러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내는 사람이야말로 현명하고 용맹한 군주였던 덧이다.   


1) 스키타이

 스키타이 동방 교역로
선사시대부터 유라시아에서 활동하던 유목민족들이 기원전 10세기 경 청동 재갈이나 등자 등 승마도구를 만들게 되자 유목의 규모는 급속하게 커 갔다. 기원전 7세기 경 유목국가인 스키타이가 탄생했다. 스키타이는 서아시아 초원에서 세계 최초의 유목국가를 수립하여 농경에 기초한 문명사회를 위협하였다. 그들은 신속한 기마전술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200여 년 동안 남북으로 대치하였다. 고도로 훈련된 경장 기마전술은 흉노, 돌궐, 몽골족 등 유목민이 이후 2천 년간 채용한 전술의 원형이 되었다. 스키타이는 독특한 동물의장을 가진 청동기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동쪽으로 스키타이 시베리아형 문화를 전파시켰다. 

훈 제국의 영역 (5세기)
2) 흉노
스키타이에 이어 탄생한 유목국가는 흉노이다. 흉노가 국가를 건설한 것은 기원전 3세기 말 모둔 선우 때이다. 주변의 초원지역을 복속시켜 흥안령에서 파미르에 이르는 초원세계를 통일한 후 중국의 한나라와 팽팽히 맞섰다. 초기에 흉노가 다소 우세하였으나, 기원전 1세기 한 무제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뒤 분열되었다. 남흉노는 중국의 만리장성 이남으로 내려와 4세기 초에 5호16국 시대를 열었다. 북흉노는 서쪽으로 이주하여 훈이라는 이름으로 4세기 후반 유럽으로 진출하여 게르만족을 로마제국으로 대거 이동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바로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훈족이다. 

3) 유연과 선비
흉노제국이 쇠퇴한 후 북아시아 지역을 제패한 것은 유연과 선비였다. 유연은 선비족이 중국의 화북지방으로 남하한 틈을 타서 몽골초원으로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를 접수하여 유목국가를 건설하였다. 이후 선비족이 세운 북위와 대립하였는데, 북위를 무너뜨리려고 중국의 남조와 연락하기도 했다.


돌궐 제국의 영역(6~7세기)
4) 돌궐
6세기 중엽 중앙 유라시아의 한쪽에서 유목을 하던 돌궐이 몽골초원을 장악하고 강력한 유목국가를 건설하여 20년도 채 되지 않아 동쪽으로는 만주로부터 서쪽은 비잔티움제국의 북쪽, 남쪽으로는 힌두쿠시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러나 수왕조가 3세 동안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재통일하던 바로 그 무렵(589) 돌궐 제국은 동과 서로 분리되었다. 동돌궐은 만주의 변경에서 만리장성과 하미 오아시스까지를 지배했고, 서돌궐제국은 하미에서 아랄해와 페르시아까지 뻗쳐있었다. 7세기 초에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데에는 고구려가 돌궐과 손을 잡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위구르 제국의 영역(8세기)
5) 위구르
8세기 중엽이 되면 위구르가 돌궐의 약화와 당 제국의 내분을 틈타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안사의 난 때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당나라를 지원하면서 중국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상업 활동에도 뛰어나, 동서교통로를 이용하여 활발한 중계무역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한편 돌궐은 서서히 서쪽 방면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뿐만 아니라 서아시아․서북 유라시아․북인도까지 진출하면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투르크계 왕조를 세우면서 성장하였다. 이 같은 형세는 한 순간의 일로 끝나지 않고 인도의 무굴제국과 오스만투르크에 이어, 오늘날 터키 민족으로까지 이어졌다. 

유목국가의 세계관 
몽골초원을 무대로 활동하던 고대 유목민들이 남긴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 주인공은 돌궐제국의 군주, 재상이었던 퀼 테긴, 빌게 카간, 톤육쿡의 비석이었다. 그때까지 유목민에 관한 지식은 중국측 기록에만 남아 있었다. 유목민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농경민들에 비친 유목민의 모습은 예의염치를 모르는 잔인한 야만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돌궐의 비문에는 “하늘과 같고 하늘에서 생겨난 나 투르크의 빌게 카간, 이제 카간의 자리에 올랐노라. 너희들은 내 말을 단단히 듣거라!”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다. 이 비문에는 유목민들이 갖고 있는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그들의 세계관은 중국인들의 ‘중화’를 중심으로 하는 일원주의적 세계관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들은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진행하듯 방위 관념도 동→남→서→북의 순서에 따른다. 흔히 우리가 동→서→남→북이라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천막을 칠 때도 문을 언제나 동쪽으로 열어 놓았고, 아침에 해가 뜨면 밖으로 나와 해를 향해 세 차례 큰절을 올렸는데 그 역시 태양 숭배와 연관된다. 


태양은 그들이 최고의 신으로 여겼던 탱그리, 즉 ‘천신’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태양의 운행을 중심으로 ‘해가 뜨는 곳(동)’, ‘해가 가운데 있는 곳(남)’, ‘해가 지는 곳(서)’, ‘밤이 한가운데인 곳(북)’으로 방위를 표현한 것이다. 
돌궐 제국의 창시자가 사망했을 때 조문 사절을 보내온 각국 명단의 순서 역시 동→남→서→북으로 되어 있다. 즉 동방의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중국과 티베트, 이어서 서쪽으로는 동로마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북쪽의 키르키스와 거란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나라와 민족들을 정치적 친소나 지리적 원근에 따라 배열하지 않고 태양의 운행에 기초한 그들의 세계관에 따라 정렬시킨 것이다.


 이 비문에는 고구려도 등장하는데 해가 뜨는 동방의 ‘뵈클리’라 했다. 고구려의 군주가  ‘뵈클리 카간’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데, ‘카간’이란 최고의 군주를 나타내는 투르크어로 ‘황제’에 비견된다. 황제가 천명을 받아 천하의 질서를 주관하는 존재이듯 카간 역시 ‘탱그리의 명령’과 ‘탱그리의 축복’을 받아 위로는 푸른 하늘, 아래로는 누런 땅 사이에 있는 사람의 아들들을 다스리는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고대 유목민들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지상에 두 명의 황제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중국인의 정치 관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돌궐 제국의 군주뿐만 아니라 중국․고구려․티베트․키르키스 등 주변의 나라를 지배하는 군주들도 ‘카간’이라는 칭호로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다원적 세계관의 소유자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비문을 남긴 돌궐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유목민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적인 측면에서 하늘인 탱그리에 대한 숭배는 고대 유목민들 모두에게 공통적이었다.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연결하는 사제들의 권위는 대단했으며, 미래를 예언하는 일을 했다. 사제란 유목민들의 ‘무당’을 말하는 것으로 무당들은 칭기스칸 시대까지 계속하여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사료] 유목민들의 생활
󰋯스키타이 인들은 수염을 기르고, 귀를 덮은 뾰족한 모자를 썼다. 그 모자는 초원의 거센 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도시도 성채도 갖지 않으며 어디를 가든 자신의 집을 갖고 다닌다. 더구나 그들 모두는 말 위에서 활 쏘는 데 능하며, 농사를 짓지 않고 가축을 치며 산다. 수레야말로 그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집이니, 그들을 어떻게 정복하고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헤로도토스, 󰡔역사󰡕 제4권

󰋯가축을 따라 옮겨 다니며… 수초를 따라 이동한다. 성곽과 항상 머무는 곳이 없으며 농사를 짓지 않는다. …문자가 없어 말로써 서로 약속하고… (사정이) 괜찮으면 가축을 따라다니고 사냥을 하여 금수(禽獸)를 잡는 것을 생업으로 하지만, 급해지면 사람들은 싸우고 공격하는 것을 익혀 침략하는 것이 그 천성이다.                          
󰋯어린 아이도 양을 부리고, 활로 새와 쥐를 쏘아 맞힐 줄 알았으며, 조금 성장하면 여우와 토끼를 쏘아 식용으로 삼을 수 있다.    -사마천, 󰡔사기󰡕, 「흉노전」

󰋯타타르인들은 지구상의 어떤 사람들보다 자신들의 영주에게 잘 복종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고난을 잘 견디어 내고, 음식이나 아무 먹을 것도 없이 하루나 이틀을 지낼지라도 초조해 하지 않고 마치 배불리 먹은 것처럼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한다.
-카르피니, 󰡔타타르라 칭하는 몽골인의 역사󰡕

󰋯목축을 주업으로 삼아 수초를 따라 이동하니 항시 머무는 장소가 없다. 펠트로 만든 텐트를 갖고 피발좌임(被髮左袵)을 하며, 고기를 먹고 요구르트를 마신다. 몸에는 가죽옷과 털옷을 입고, 노인을 천하게 여기고 젊은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수서󰡕, 「돌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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