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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고대 그리스 분석][스파르타와 아테네 분석][폴리스 분석][헬레니즘 심층분석]지중해 세계와 그리스 심층분석

by 9급일벌 2021. 1. 20.

 

목차

 

1. 들어가기

2. 지중해와 그리스

 

그리스 문명에 대한 시각

1) 서구인이 보는 그리스 : 유럽의 정체성, 자부심의 원류

2) 근대 유럽인에 의해 왜곡된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 -공동체 부활을 목표로 한 철저한 제도 교육

-아테네의 민주정 발전 -솔론 개혁의 경제적 의의

-폴리스의 내부 구성

-스파르타의 군국주의와 아테네의 민주주의

 

헬레니즘 시대

1) 헬레니즘의 의미

2) 확대된 폴리스와 개인의 대두

3) 스토아 학파

4) 에피쿠로스주의

5) 회의학파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

 

-헬레니즘 시대의 교류

 

3. 참고문헌

 

 

 

1. 들어가기
고대 그리스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에서 가장 큰 특징은 민주정이다. 특히 민주정의 전형이 되었던 아테네와 아테네인은 정치적 성과 외에 철학적, 예술적 성과도 함께 언급되면서 최상의 문화를 만든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치의 발전 이면에는 최하층으로서 생산과 노동을 담당했던 노예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아테네의 황금기이자 민주정치의 완성이라는 페리클레스의 통치기에 아테네 시민의 자격은 더욱 제한되었고, 아테네의 번영은 주변 폴리스들에 대한 제국적 지배가 뒷받침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폴리스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테네인들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폴리스에 공헌을 했고, 그 보상으로서 정치적 권리를 확대해 민주정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시민의 관계에 대한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한 것으로 내용의 흐름을 정하였다. 


우선 그동안 아테네와 비교되었던 스파르타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였다. 군국주의국가였음에도 당시 스파르타는 폴리스 공동체의 이념을 잘 실현한 곳으로 부러움을 받기도 했고, 여러 세기 동안 아테네와 경쟁했던 군사강국이었다. 그런 면에서 아테네와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파르타 그 자체를 살펴봄으로써 폴리스의 시민과 노예의 존재에 대해 더 이해를 깊이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어서 폴리스가 사라진 세계로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과 종교에 대한 자료를 부가하였다. 헬레니즘은 단지 예술과 철학으로만 언급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삶을 규정하는 존재로서 철학은 소수 지식인의 것이었고, 헬레니즘의 특성은 일반인들에게서는 오히려 종교로 나타났다. 이때의 종교적 성향은 이후 로마로 이어져 최종적으로는 크리스트교의 성장과 국교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2. 지중해와 그리스

그리스 문명에 대한 시각
1) 서구인이 보는 그리스 : 유럽의 정체성, 자부심의 원류

황소(제우스)에 올라탄 에우로페와 유럽연합의 상징
고대 그리스인에게 찾아가 바르바로스와 그리스인을 구별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뭐라 대답할까? 그리스인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바르바로스는 노예다. 그러나 우리 헬레네스는 자유인이다." 여기에서 정치적 의미가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오직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이 말을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이 말은 꼭 그리스인이 자신을 스스로 통치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인은 법에 의해 지배를 받았고, 그 법은 공개되었고 정의를 존중했다. 부적절하게 '자유'라고 번역되는 그 단어에 절박함과 강렬함을 더해주는 것은 바로 인간됨의 존엄성에 대한 이러한 의식이다. 단순히 그리스인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것 이외에 이 사람들과 그리스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그 답은 바로 그리스인이 어떤 정치형태를 개발했다는 점이다. 이 정치형태를 우리는 꼴사납고 부정확한 단어인 '도시국가'라는 말로 번역한다. 이 정치형태는 인간의 고상한 본능과 능력을 자극하는 동시에 만족시켰다. 원래는 공동의 안보를 위한 지역적 결사체로 시작했는데, 이후 인간의 도덕적, 지적, 미적, 사회적, 실제적 삶의 초점이 되었고, 이전이나 이후의 그 어떤 형태의 사회와도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개발하고 비옥하게 만들었다는 정도만 언급하겠다. 다른 형태의 정치적 사회들은 '정체'된 상태였던 반면, 그리스인은 도시국가 덕분에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이전보다 더 탁월하게 만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2) 근대 유럽인에 의해 왜곡된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이란 그리스인들, 특히 아테네인들이 헬레네스와 바르바로이로 구분한 그리스 중심적 인식 체계를 18세기 이후의 유럽인들이 유럽인 대 비유럽인이라는 더 큰 틀로 확대한 것이다. 그리고 근대 유럽인들이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 문명을 수용한 것은 자신의 역사적․문화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 문명을 근대 유럽 문명과 억지로 꿰어 맞추어 그것을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계속 이어 내려온 찬란한 문명으로 분식하려한 것이다. 그리스 문명을 외부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하나의 독자적이고 완결된 문화 체계로 보려는 태도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유럽 문명의 우월성과 순수성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실 문화적 교류가 지속된 동부 지중해에서 인접한 나라들 사이에 문화적 장벽을 구축하고 그것을 두 개의 별개 문화권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고전 그리스의 많은 학자가 그리스 본토 출신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반도의 해안 지역과 그 인접한 섬들을 가리키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온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페르시아전쟁 당시에도 그리스 편에서 싸우는 그리스인보다도 페르시아 왕 밑에서 싸운 그리스인이 더 많았다. 또 그리스 본토보다는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 지역을 가리키는 마그나 그레키아에 사는 그리스인이 더 많았다. 따라서 이런 이분법적 문화 구분이 작위적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8-19세기의 유럽인들이 백인종적이고 유럽적인 그리스를 만들기 위해 종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혀 동질적이 아니며 유럽이라는 문화적 실체가 존재하지도 않던 고대사 전체에 근대 유럽적 관념을 투사한 것이다. 그 결과 현대인들이 고대의 종족적․문화적 혼합성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스파르타 -공동체 부활을 목표로 한 철저한 제도 교육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는 부족 원로들에게 데려가 아기를 검사하도록 했다. 아이가 튼튼하고 정상이면 원로들은 양육을 명령한다. 부족 성원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검증하는 절차였다. 이렇게 해서 심사에 통과한 아이에게는 클레로스(klieros)라는 토지를 할당한다. 아이들은 7세가 될 때까지 집에서 부모나 유모가 양육했다. 부모에게는 아이가 음식을 달라는 대로 주지 않게 했고, 마음대로 놀 수 있도록 새 옷을 자주 갈아입히지 않게 했으며, 혼자 내버려 두어도 겁내지 않고 보채지 않도록 했다. 


아이가 7세가 되면 집을 떠나 아고게라는 단체에 들어가서 생활했다. 교육 기간은 20세까지이므로 14년간 공교육을 받았다. 12세까지는 아이들의 야성을 기르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12세가 되면 훈육 강도가 높아졌다. 일년 내내 옷 한 벌로 생활해야 하며, 소량의 식사를 하고, 강에서 따온 풀로 만든 잠자리에서 잠들었다. 이들에게 자유시간은 거의 없었다. 14세에 이르면 모의전으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20세에는 인내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군인의 덕목이라 할 용맹, 영예, 정의를 배웠다. 


아고게를 졸업한 청년은 다시 30세가 될 때 까지 10년간 공동생활을 했다. 이들은 스파르타의 군인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아직 시민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없었고, 오직 국가 성원으로서 왕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만을 지상 목표로 했다. 이와 관련하여 60세까지 피티디온(phitidion)이라는 회식 단체에서 생활해야 했다. 성원 숫자는 15명인데, 이 단체의 성원은 함께 식사하고, 함께 훈련하고, 함께 전투했으므로, 사회 단체이자 군사 단체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30세가 된  스파르타인은 완전 시민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군 복무는 필요한 경우에 했으나, 피티디온 단원으로서 의무는 계속 수행했다. 의무 복무 기간은 60세까지였다. 그래서 그때까지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면 시민권을 잃을 수도 있었다. 
60세 이후에도 스파르타인은 시민으로서 역할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원로로서 신생아 신체검사를 하고, 아고게 훈육을 감독하고, 2명의 왕과 더불어 게루시아 라고 하는 원로원을 구성하여 정치와 재판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이처럼 스파르타 시민은 일생을 국가를 위해 살았다.


스파르타의 교육에서는 자식은 개인 소유가 아니라 국가 소유라는 관념이 구현돼 있었다. 이와 같은 체제에서 계층 간의 위화감은 자리 잡기 어려워진다. 공동체 부활이 교육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스파르타식 교육은 확고한 애국심을 낳았다.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스파르타 전사들은 자신의 생명을 자기적으로 삼고, 죽음의 어두운 영혼을 태양의 빛줄기처럼 친근하게 여기며, 자신의 방패를 힘껏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료] 스파르타의 여성 교육
뤼쿠르고스는 여성을 훈련시켰다. 경주, 씨름, 쇠고리, 창던지기 따위로 처녀들의 몸을 단련하여 튼튼한 모체에서 자녀들이 나며, 또 순산하기를 도모했다. 여자들이 부자연스럽게 안방에 숨어 있는 풍습을 버리고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몸을 드러내고 행렬 속에 끼며 제례를 드릴 때는 남자들이 있어도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게 했다. 남자들 행동이 바르지 않을 때 여자들의 야유는 질책으로서 큰 가치가 있었다. 왜냐하면 여자들의 농과 야유에는 심각한 꾸중의 칼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장한 일을 하여 여자로부터 칭찬받는 남자는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물러갔다. 그러한 장소에는 연장자뿐만 아니라 왕과 원로들도 자리해 있었다. 처녀들이 이와 같이 나체를 보이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추잡하지 않고 점잖게, 그리고 순박한 기질을 양성하고, 건강의 가치를 가르쳐주고, 남자 못지않게 영예와 용기를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뤼쿠르고스〉
-󰡔사료와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 산책󰡕 

아테네의 민주정 발전 -솔론 개혁의 경제적 의의
솔론의 개혁은 '부담을 흔들었다'라는 뜻의 세이삭테이아(seisachtheia)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담보 표시로 농지에 박은 호로이(horoi)라는 말뚝을 제거한 것, 팔려간 자들이 아테네로 돌아오게 한 것, 부당하게 노예로 전락한 자들을 해방한 것, 그리고 이후에는 인신 담보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우선 솔론이 취한 긴급 조치는 일단 부채로 일어난 인신 예속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아테네 시민은 부채 때문에 노예가 되는 일은 없어졌고,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 노예가 되면서 이들을 일종의 물건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개념의 노예를 동산 노예(chattel slavery)라고 하는데, 이런 형태가 이후 서양 고대의 전형적인 노예제로 자리 잡는다. 여기에서 솔론은 예속된 빈민에게 자유를 주었으나 농지를 재분배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대신 상공업을 육성하는 쪽으로 경제의 방향을 틀었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직업을 전수하도록 하고, 가족과 함께 정착하는 외국인에게 아테네 시민권을 부여하며, 시민들의 생활 근거를 조사하여 게으른 자를 처벌하고, 곡물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되 올리브 수출은 적극 장려한다.

아테네의 도자기
이러한 정책은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가히 혁명이라고 할 만하다. 이른바 생존을 위한 농업에서 환금 작물을 생산하기 위한 농업으로 전환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상업과 공업의 발전이 수반되어야 한다. 아직 유치한 단계였던 아테네로서는 코린토스와 에우보에아로부터 도량형과 화폐를 들여와야 했다. 협소한 농지로써 늘어나는 인구를 충분히 부양할 수 없었던 전반적인 사정을 고려하면, 이런 식의 전환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솔론의 경제 정책은 새로운 사회 계층, 이를테면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 장인, 선원, 상인들이 많아지게 했다. 
솔론의 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솔론이 농지의 재분배를 시행하지 않은 것을 두고 미온적인 개혁이라는 평가도 있고, 솔론이 직책을 사임한 뒤 약 30년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된 것을 고려하면 단기적으로는 성공한 개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솔론이 일으킨 개혁은 클레이스테네스에 이르는 민주 정치 실현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기원전 520년에 이르러 아테네산 도자기가 전 지중해(-본문에는 유럽으로 되어있으나 지중해로 바꾸었음)를 석권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제 개혁은 크게 보아 성공을 거두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폴리스의 내부 구성
대표적인 폴리스인 아테네의 전성기 때 모습이다. 폴리스는 중심의 시가지와 주변의 농경지로 구성된다. 주변의 농지는 주로 시민들의 농경지와 마을이나 씨족 공동체의 공유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진에 흰 석회암 언덕(높이 60-70m, 동서 길이 300m, 남북 길이 150m)이 보이는 데 이 주변에 성벽(성벽을 그리스 어로 ‘폴리스’라 한다)을 쌓아 최후의 방어 거점으로 삼았다. 이 언덕을 아크로폴리스(아크로는 ‘높은’이라는 뜻이니 아크로폴리스는 높은 언덕 위의 도시라고 풀이할 수 있다)라 한다. 언덕 위에 신전, 극장 등이 있다. 성채 아래쪽에 광장․시장의 역할을 하는 아고라가 있다.                                                          


스파르타의 군국주의와 아테네의 민주주의
아테네에서 쓰던 배심원 추첨기-이름을 적은 표를 홈에 꽂아 넣고 물을  위에서 흘려 빠지는 이름표를 순서대로 하여 배심원을 선정하였다.
스파르타의 체제는 전체적으로 볼 때 귀족정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스파르타 시민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철저한 민주정이기도 했다. 2인의 왕은 세습되는 두 가문으로부터 선출되는 귀족 중의 대표자로서 군사지휘관의 성격을 띠었을 뿐 정치적인 최고권을 보유했던 것은 아니다. 60세 이상의 스파르타 시민으로 구성되는 원로원이 법률 제안 및 재판의 권한을 보유했으며, 스파르타의 전 시민으로 구성된 민회는 의결권과 공직자 선출권을 행사했다. 행정부의 성격을 띤 5인의 집정관(에포로이)은 행정적 업무를 총괄했으며 관직자의 행동을 감시했다. 특히 헤일로타이에 대한 엄중한 감시와 탄압이 그 중요한 업무였다. 스파르타의 정치 및 사회체제는 거의 변화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유지되어 정치적 소요로 시달리던 인근 그리스인들의 동경을 받았다.
민주적이라는 아테네 정치체제에도 내부적인 한계와 모순이 내포되어 있었다. 공식적인 관료집단이 결여되어 항구적인 정책을 기대하기가 어려웠으며, 따라서 유력하고 부유한 인물이 암암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국정의 주요 방향을 제시했던 10인의 장군은 민회에서 선거로 선출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지만 연임이 가능했다. 기원전 5 세기 후엽 전성기 아테네의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추첨과 선거의 병행은 아테네 정치체제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아테네의 민주정은 그 참여의 폭이 극히 제한된 폐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외국인과 노예 및 여성들을 제외한 약 4만 명의 시민만이 정치적인 권리를 행사했던 것이다. 또한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가능케 한 여가를 제공해주었던 것은 바로 노예노동이었다.                                          

헬레니즘 시대
1) 헬레니즘의 의미 
역사적으로 헬레니즘 시대는 기원전 32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부터 기원전 30년 이집트 멸망까지의 약 300년간을 가리킨다. 독일사가 드로이젠은 헬레니즘사에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융합된 문화를 가리킨다. 그리스적 문화,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헬레니즘 문화는 특히 도시 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향유하였다. 도시의 거주민들은 '코이네'라는 공용화한 그리스어로 말했고 사람들은 어느 도시에서나 비슷한 공간적 구조 속에 살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탄생한 그리스 문화는 일종의 공동 문화로서 보편성을 띤 문화였다. 고전기 문화에서 결여되었던 이 요소는 지역과 인종간의 장벽이 무너짐과 아울러 가미된 것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보편주의란 코스모폴리터니즘이라 칭하는데, 이것은 그리스인들이 폴리스를 대신하여 나타난 범민족적 혹은 초민족적 국가의 등장이라고 하는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가지게 된 사고의 경향이었다. 이러한 사고의 경향으로 인하여 그리스인들은 개인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인 생활 방식과 취향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 시기의 문화 전반에서 그 특성이 발견되는 것이다.                                      

2) 확대된 폴리스와 개인의 대두
고전기 그리스인들은 개개의 존재를 전체의 연관 안에서 파악하여, 살아 있는 전체, 즉 폴리스를 형성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오면 엄청나게 확대되고 다양하게 되어 거의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한 공동체에 대하여 애착이나 관심을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현실도피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사고의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와의 유기적인 관계 내에서만 인식되던 '개인'이 점차 개체 그 자체로서의 '개인'으로서 인식 혹은 고려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폴리스 시대의 인간 형성이 개별화된 인간을 초개인적 존재로서 공동체 속에 유기적으로 편성함으로써 이루어졌다면 헬레니즘 시대에는 전체화된 인간을 개별화함으로써 인간을 파악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3) 스토아 학파
스토아 학파의 사상적 원천은 디오게네스에게서 일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급변하는 세계에서 외적 세계의 자극에 동요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의 사물에 대한 욕망이나 집착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금욕주의 사상이다.
스토아 학파에 있어서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는 방법은 유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덕은 각자의 이성 혹은 의지에 있는 것이고 타인은 나의 신체를 상해하고 생명을 약탈할 수 있으나 나의 이성을 손상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을 지키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면 따라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토아 학파는 '이성'은 모든 자유의 기초라고 보았다. 
스토아학파는 헬레니즘 세계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의 이상국가론을 펼쳤던 것이다. 이들이 이상으로 여기던 국가는 신법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로서 백성들은 자발적 동의와 사랑에 의해 하나가 되는 거대한 국가였다. 이것을 그들은 코스모폴리터니즘이라 칭했다. 이러한 국가관에서 소위 자연법 사상이 나오게 되었다. 보편적 세계의 질서는 이성의 법을 따르게 되는데 그들은 그 이성의 법이란 다름 아닌 자연법으로서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곧 인간의 의무라고 본 것이다.

4) 에피쿠로스주의
이 사상은 욕망을 줄임으로써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쾌락주의라는 번역은 치명적인 오류이다. 에피쿠로스주의는 금욕주의이다. 문명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겨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에 문명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가르친다. 문명에는 사회제도와 관습뿐만 아니라 신, 내세, 영혼, 천국, 지옥 등이 포함된다. 종교는 인간의 불안이나 공포심을 조성하여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현세에서 최대한 행복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근대 초 에피쿠로스가 무신론자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에피쿠로스주의야말로 헤브라이즘과 대조되는 인본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5) 회의학파
회의학파도 인간이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우리가 외계의 사물에 동요되는 근본 원인을 불확실한 지식을 맹신하고 진위 선악을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일체의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인간 지식의 가능성을 회의한다는 의미에서 회의주의라 칭한다. 물론 여기서 회의란 윤리적 회의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나를 환경의 요구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단중지란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음"을 의미하며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아파테이아, 아타락시아 등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개념들을 통해 헬레니즘 시대인이 사회적 동요에 짓눌려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꿈꾸고 정치가 가져다 줄 수 없는 구원을 철학에서 이미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종교가 갖는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바로 개인주의를 토대로 한다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성향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일신 숭배 사상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국가라기보다는 "거주하는 세계"로서 하나의 문화가 형성되는 세계였기 때문에 각 국가 내지 지역의 고유한 신앙 형태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띤 신앙 형태가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시스-티케 여신상-이집트의 여신으로 헬레니즘 시기 유행하였다.
헬레니즘시대의 종교적 개인주의의 또 하나의 현상은 제설혼합주의(諸說混合主義)이다. 제설혼합주의란 한 신을 다른 신들과 동등하게 혹은 적절히 융합시켜서 한 신의 형태로 체계화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의 종교적 심성을 살펴보면, 폴리스의 쇠퇴와 더불어 그리스 세계에서는 올림피아 종교의 쇠퇴 현상이 나타났고 한편으로는 동방 정복을 통하여 동방의 종교 문화를 접하게 된 그리스인들 가운데 동방 종교를 받아들이는 예들이 나타났다. 


그리스 세계에 전파된 동방 종교의 영향 중에 눈에 띄는 현상은 바빌론의 별숭배, 달리 말해서 점성술이었다. 바빌론의 점성술은 일종의 비도덕 운명론으로서 머잖아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신이 지배하는 운명보다 더 강력한 신을 찾도록 하였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그리스에서는 그노시스파와 마술, 동방 신비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노시스란 '지식'을 의미하는데, 그노시스파에 의하면 어떤 신은 선택된 영혼에게 우주의 비밀을 풀 열쇠를 직접 나타내 보여주며, 그 우주의 비밀을 풀 열쇠, 즉 지식을 발견한 인간은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성이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개인주의적 종교 심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은 무엇보다 신비교라 할 수 있다. 신비교에서는 그 스스로 죽고 다시 살아나는 구세주 신과 개인과의 결합에 의해 인간은 구제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특히 이집트의 신비교는 그리스 세계에 널리 전파되어 도처에서 사라피스와 이시스를 구세주로서 숭배하는 신도들이 나타났다. 사라피스 종교의식은 내세에 대한 그리스의 관념과 본질적 문제에 대한 트라키아인과 아나톨리아인들의 사상이 결합된 신앙을 토대로 한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종교의 중요성은 크리스트교에서 그리는 세계를 먼저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있으며 장차 이 지역에서 크리스트교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는 데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교류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 예술양식과 함께 그리스 문화의 피상적 측면-운동경기, 연극, 포도주-도 인도에까지 전파했다. 더 중요한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이 페르시아 왕실이 축적했던 재물로 화폐를 주조하여 단기간에 유통시킨 덕분에 그리스의 도시 시장이 서남아시아와 이집트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사채업자가 정부관리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일반인에게서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함에 따라 화폐경제가 출현했다. 신약성서에서 세리는 탐욕스럽고 사악한 자들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징세인은 빌려준 돈만큼 아니 더 이상 세금을 걷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했다.


금융업이 생겨나자 장거리 무역의 규모가 훨씬 커졌고, 시장가격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가 정치적․문화적 경계를 훌쩍 넘어 크게 확대되었다. 그 결과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이 광범위한 교역망으로 연결되었다. 게다가 기원전 120년경 그리스 선원들이 이집트로부터 계절풍을 타고 인도 남쪽 바다를 왕래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자,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의 바닷길을 통한 고대 해상무역이 팽창일로의 지중해 무역체제에 연결되었다. 기원전 140년경 이후에는 인도와 중국을 오가는 해상무역도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올드웹은 더 넓은 지역에 재화와 용역은 물론이고 매력적인 기술과 사상을 전파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활기차고 역동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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