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레포트

[삼국사기 분석][삼국사기 논문][김부식 삼국사기]삼국사기 관련 논문 분석 및 나의 생각

by 9급일벌 2021. 1. 20.

 

목차

1.<삼국사기의 성격> -이강래

삼국사기의 사서적 위상

김부식의 역사 인식

 

2.삼국사기의 원전 자료와 사료 비판-정구복

삼국사기의 원전 자료

사료비판

 

3.민족주의 사학자의 삼국사기인식-전덕재

신채호의삼국사기비판

기타 민족주의 사학자의 삼국사기인식

민족주의 사학자의 삼국사기인식의 한계

 

4.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나의 생각

 

 

 

정치가와 역사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고려 왕조의 현실 정치가 이기도 하다.삼국사기에 담김 이야기는 과거 삼국시대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만 또한 그것은 고려시대의 저작물 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 정치가 김부식과 역사가 김부식의 양 측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삼국사기12세기 전반 고려의 현실에서 김부식이 그 자신의 관점에서 삼국의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이다. 12세기의 고려는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나 많은 변화를 겪었다.

먼저 내적으로는 외척이 주도한 왕권 도전과 이로 인한 왕권 추락을 겪었으며 외적으로는 쇠락해가는 거란의 를 대신해 여진의 이 무서운 속도로 부상하며 고려에 사대를 강요해왔다. 이를 두고 국내에서는 논쟁이 촉발 되었다. 이러한 정세 변화와 함께 고려왕조의 모순은 심화되어 왔고 이에 대한 고려관료들의 대응 방식은 양분되었다. 개혁론을 주장하는 세력의 대표자는 윤언이 이었으며 정치 제도의 개혁보다는 훼절된 제도 본연의 정신을 회복해 운영하자는 의견의 대표자는 김부식 이었다.

전자의 가장 대중적이고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묘청의 주장이다. 도참사상에 근거하여, 지배계층이 분열화 되어있을 때 이 주장은 크게 성행하였었으나, 이것은 유교적 세계관에 대한 부정을 의미 했으며 김부식은 진압의 총사령관을 맡아서 진압을 진두 지휘한다. 김부식은 진압을 성공적으로 수행 하였으나 곧 이어 묘청난과 관련되어 사퇴했던 윤언이 역시 복권하였다. 윤언이의 복권은 결국 김부식의 패배를 의미한다. 1142년 김부식은 관직에서 사퇴하였고 3년 뒤 삼국사기의 편찬을 마쳤다. 이는 마치 중국의 왕안석과 사마광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데, 김부식은 사마광에 자신의 감정을 대입시켰던 것 같다. 김부식은 정치가 사마광의 현실 인식 및 대안에 동의했으며 사마광이 자치통감편찬을 통해 토로하고자 했던 바에 공감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사서적 위상

 

삼국사기는 편찬 당시 까지 존재하던 국내외의 모든 사서, 기록물들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사서이다.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를 통해 인종에게 삼국사기 편찬의 당위성을 이야기 하였는데 삼국사기편찬의 목적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기존의 중국 측 사서들이 중국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다 보니 당연히 우리나라의 기록은 짧고 간략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국 측의 삼국 관련 기사는 질과 양 두 가지 측면에서 허술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대의 지식인들 마저도 삼국의 역사는 모르면서 중국의 역사는 꿰뚫고 있는 지경이었다. 둘 째, 고기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물론 고기삼국사기전체에 걸쳐서 기초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부식은 문체와 내용, 효용성 등에서 고기의 한계성을 지적했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김부식의 이른바 고기는 구삼국사에 비견된다. 이규보는 삼국사기이전의 역사서로써 구삼국사를 들었는데 이 점에서 고기의 미흡함이란 구삼국사의 미흡함을 가르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김부식은 철저한 유학 신봉자 였으므로 구삼국사가 다루던 신이사(神異史)에 대해서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신당서를 편찬한 찬자들이 구당서를 비판한 것이 떠오른다. 신당서의 저자 증공량은 진당서표에서 구당서를 비판하고 있는데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는 바로 이 진당서표를 모델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특히나 사론에 있어서 신당서를 많이 채용한 반면 구당서를 채용한 것은 전무한 것을 보아 결국삼국사기구당서에 대한 신당서의 위상을 겨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여 삼국사기의 지향점을 정리해 보면 크게 세 가지이다. 첫 째가 문장에서의 고문의 회복이고, 둘 째가 신이한 기록의 배제, 사실로써의 관련 기록을 충실히 서술할 것, 셋 째가 현실에 대한 권계에 합당할 것 등이다. 고문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는 구당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문주의의 맥락에서 신당서를 쓴 논리는 삼국사에 대한 기록으로써구삼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김부식이 틀림없이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지향점인 관련 기록을 충실히 서술했다는 점을 살펴보면, 구삼국사의 한계점을 타계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했다고는 하나 사실 그 한계라는 것은 시대와 관점에 따라 매우 유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지향점인 현실에 대한 권계에 합당한 사서여야겠다는 것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의 오류들과 모순, 시대에 맞지 않는 정보와 자료 등을 고려해볼 때 어쩌면 김부식에게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부식이 기존의 기록을 존중한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김부식은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위하여 중국의 여러 사서 및 경서·문집 등과 함께 구삼국사를 비롯한 국내 사료와 금석문 등을 이용하였다. 따라서삼국사기는 기족 역사 사료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삼국의 역사를 인식하려 했다는 의의를 가진다. 결국삼국사기는 합리적인 本史의 위치를 얻고야 말았다. 물론삼국사기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삼국사기는 이전까지 존재하던 사서에 대한 한계 극복과 종합인 동시에 이후 모든 삼국사 관련 역사서들의 모본이라 할 수있다.

 

김부식의 역사 인식

 

삼국사기에는 모두 31개의 사론이 있다. 이 사론에는 이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편찬가의 주관적 인식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김부식은 사론에서 역시 중국의 사서에 있는 사론을 토대로 하였다. 여기서 또 다시 김부식이 친 중국적인 유학인임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은 특히나 중국의 사서들 중에서 좌전신당서를 많이 참고하였다. 앞에서도 살펴봤듯이신당서의 경우, 문체와 그 체제 있어서구당서와 구분되며 좌전역시 대의명분을 중시한 춘추와 달리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여기서도 신이사를 배척하고 객관적인 서술을 중시했던 김부식의 역사 인식을 볼 수 있다. 동시에 역사적 사실과 사실에 대한 평가 기준까지 일정하게 수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사실에 대한 서술과 같이 사론에서도 중국을 따르는 유교적 명분보다 국내 고유 기록을 중시하였다. 신라의 연호나 왕을 이르는 명칭에 대해서 우리 고유의 것을 중시하였다. 또한 신라를 비롯하여 삼국의 고유 제도들 역시 그것이 비록 유교적 가치에 합당하지 않더라도 역사를 기록하는데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것이라 판단하여 서술을 하였다. 그러나 제도와 관련된 부분 이외에 인물에 대한 사론들은 유교적 윤리에 토대를 두어 서술하였다.

정계에서의 경험은 또한 왕조 질서의 근간과 통치에 대한 서술, 또 외교 관계에 대한 서술 에도 관여하였다.

후대에 자주적이고 애국적인 세력으로 자주 묘사되는 서경세력들은 김부식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대적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실상은 당대 고려를 풍미했던 개경쇠망설의 연장이거나 변형에 불과했다. 김부식은 이들에 대한 반론에 앞장 섰으나, 의종은 결국 반 유교적인 입장으로 치우였다. 의종은 서경 세력들을 복권시켰고 이에따라 김부식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이처럼 현실적 상황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김부식이 썼었던 저작물이 바로삼국사기이다. 김부식은 김유신의 위대함 보다 김유신에 대한 신라왕실의 신뢰를 더욱 상세하게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논거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삼국 시대를 새로운 시각에서 서술하였던 역사서인 동시에 12세기 고려 왕조의 위기에 대한 김부식의 정치적인 대항책이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의 원전 자료와 사료 비판-정구복

 

삼국사기의 원전 자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사용했던 원년 자료를 크게 궁내 자료와 개인 소장 자료로 나눌 수 있으며 또한 동시에 국내자료와 국외자료로 구분할 수 있다. 국외 자료는대부분 중국의 사서를 말한다. 중국 사료의 경우 현재에도 비교가 가능함으로 확인할 수가 있으다. 그러나 현재 삼국사기이전의 국내 자료가 거의 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내 자료는 비교가 어려운 것이 현재 실정이다. 현재까지 연구에 의하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참고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대표적인 국내사서는 고기인데, 이는 구삼국사를 일컫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구삼국사의 원전 자료를 살펴보는 것이 삼국사기의 원전 자료를 살펴보는 것보다 우선되어야한다. 구삼국사에서 이용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국내 원전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 영양왕 11년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왕명을 받고 유기라 불리는 옛 역사서를 요약, 정리하여 편찬한 5권짜리의 신집이 있다. 고구려는 이미 오래전에 한자문화를 수용했으므로 역사서의 저술도 빨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삼국사편찬 시 유기의 자료를 직접 이용했는지 신집의 자료만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현재로서는 확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유기가 그대로 전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구려 멸망 시에 고구려 역사와 문화가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 멸망 기사를 포함하여 후기의 자료는 대부분 중국 측 사료에 의하여 삼국사기저작에 보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 낙랑, 대방과 인접하여 있었고 한사군으로부터 일찍이 귀화인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초기부터 한자가 도입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박사 고흥이 서기라는 역사서를 편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백제역시 앞선 고구려의 경우와 유사한 맥락으로 백제 후기의 기록 전래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5C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의 문장이 서툰 한문체로 쓰여진 점에서 한자사용이 늦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나물왕대에 중국의 나라에 사신을 보낸 점으로 보아서 신라의 한자 사용을 2세기 이전으로 올려 잡을 수 없다. 그리고 진흥왕 때, 이사부의 건의에 의하여 거칠부를 시켜 국사라는 역사서를 편찬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따라서 국사에 실린 초기의 내용은 대부분 구전되어 오던 기사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삼국의 역사편찬물들이 구삼국사에 그대로 이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삼국사에서 이용된 것을든 아마도 이러한 사서들이 통일되고 재정리 되어 실렸을 것이다. 물론 원전자료라 하더라도 그 자체가 모두 사료적 신빙성을 갖는 것은 아니며 국외 자료라 하더라도 그 신빙성이 보장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특히 중국사의 경우 우리나라의 역사를 자신들의 주변국의 역사, 주변사로 다루었기 때문에 연대가 분명하지 않으며 잘못씌여진 서술이 많이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원전자료에 대한 사료비판이 필요하다.

 

사료비판

삼국사기는 엄밀히 말해서 원전 자료적인 성격과 김부식이 편찬한 서술이라는 두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삼국사기가 현대 한국고대사의 원전 자료로 이용되고 있지만 말이다. 삼국사기는 고대의 자료를 그대로 전하지 않고 자신의 문장으로 서술한 예가 있고, 원전 자료가 몇 차례 재정리된 자료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고려사보다 원전자료적인 성격이 낮게 평가되고 있다.

삼국사기의 사료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사료 비판이 주로 문헌실증적인 비판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문헌실증은 역사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지만 이러한 문헌실증적인 비판을 넘어서서 문맥을 검토하는 사료 비판이 가해져야 할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단순히 삼국사기의 편찬자가 서술해 넣은 부분이라 하여 모두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문헌실증과 문맥의 내용을 통하되 그 역사적 지역에 대한 유적지가 조사되고 그에 따른 고고학적 입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처럼 문맥검토는 단순 기사만이 아니라 전체의 문맥이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김부식이 윤색하거나 보충하였을 가능성 역시 그 진실성 여부는 문헌 고증과 함께 문맥의 검토를 거쳐서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이 과정에 역시 고고학적인 성과가 반영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의 사료 비판은 고대사만이 아니라 한국사학계 전시대에 요구되고 있다. 앞으로 더 과학적인 고대사 연구의 발판을 만들기 위하여 철저한 사료 비판과 함께 고고학적 인 성과가 뒷받침되는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 사학자의 삼국사기인식-전덕재

 

신채호의삼국사기비판

 

종래에 그에 대한 평가는 그리 호의적인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삼국사기는 삼국 및 통일신라 역사 연구의 기본 사료로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비판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며 특히 일제식민지 시기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삼국사기의 가치를 폄하하였다. 그들은삼국사기를 사대주의 사서의 전범으로 인식하였고 그것의 사료 가치를 극도로 폄하하였으며 기사의 사실성에 대해서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대표적으로 신채호가 그러하였다. 신채호는 일제시대 민족주의 사학자의 대표로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세의존적인 사대주의 사상을 배격하고 민족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인식은 그의 역사인식이나 역사연구방법론에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삼국사기등의 여러 사서들 때문에 우리나라 고대사의 실상이 비주체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하였고, 삼국사기에는 우리나라의 자주성을 억압하고 사대주의 사상에 입각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고 비판하였다. 특히나 신채호는 독립자존의 고대사를 말살하고 비주체적사대주의적 역사인식을 널리 퍼뜨린 주범으로 김부식을 지목하였다. 신채호는 삼국사기의 사관을 비판하기 위해서 먼저 김부식의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폄하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채호는 김부식을 중국서적을 독점하고 자신의 박학을 과시하려 했다며 비난했다.

 

그러면서 나아가 그의 사학적 두뇌가 결핍하기까지 하다고 공격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묘청의 난을 낭불兩家 儒家, 국풍파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이해하고 전자의 대표로서 묘청, 후자의 대표로서 김부식이라고 지정한 후 그 싸움에서 김부식이 승리함으로서 조선역사가 사대적 유교 사상에 정복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낭불양가, 국풍파, 독립당의 대표인 묘청일파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를 계승하였으나 김부식은 존화주의적인 사대를 국시로 삼았기에 압록강 이내의 영토만으로 안주하였으며 결국 김부식의 승리로써 압록강 이동의 소국을 만들려고 하는 반도중심 사관이 널리 퍼졌다고 주장하였다.

 

또 신채호는 김부식이 자존독립의 진취사상을 담고 있는 낭가와 불가 계통의 사서를 없앴으며 그와 관계되는 사실들을 가감하거나 개작하였음을 강조하였고, 동시에 김부식이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내용은 더하고 빼면서 개작하였고 자신의 이상을 투영 시키는데 급급했다고 주장하였다. 신채호는 특히 부여와 발해사를 제외시킨 것을 두고 우리나라를 압록강 동쪽의 소국으로 만들 작정에서였다라고 단정한 다음 한반도의 영토가 본래는 동몽고까지 연접한 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유교 사상에 맞추기 위하여 삼국사기에서 부여와 발해를 실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신채호가 김부식의 저술서인 삼국사기를 부정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사관이나 그의 사가로서의 자질을 비판하였다. 이러한삼국사기부정의 기저에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내용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신채호는 김부식이 연호가 모호한 사실이면 그 사실의 유무를 상세히 연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연월을 개입한 것이 허다하다고 언급하여 그가 기년을 마음대로 조작했다고 이해했다. 특히 기년과 관련해서 김부식이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연대를 삭감한 사실을 지적했다. 또 고구려와 백제의 이야기는 적제 기술한 반면 신라의 경우 위찬이 많아서 사료로 근거할 것이 적다고 주장했다.

 

신채호는 고려와 조선 시대의 사서 편찬자들이 사대주의 역사관에 물들어 본래의 독립자존의 우리 고대사를 감추고 사대주의적인 내용의 역사를 편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서들은 사료로서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사대주의에 입각하지 않은 몇몇 사서들을 고대사 연구의 기본 사료로 활용했고 결과적으로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것과 다른 내용의 고대사상을 구축하였다.

 

기타 민족주의 사학자의 삼국사기인식

 

이러한 신채호의 삼국사기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은 일제식민지 시기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최남선은 첫 째삼국사기가 유교적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고대의 사료 원형을 왜곡, 변형 시켰다는 점, 둘 째, 자구를 맞추기 위하여 신축과 첨삭을 임의로 하였다는 점, 셋 째, 주관적 판단에 의거하여 사료를 취사선택하였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면서 고대의 역사를 고증하기 불가능 하다고 말하였다. 최남선은 해방 후에도 이러한삼국사기에 대한 이러한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유지하였다.

 

박은식은 비록 한국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신채호의 삼국사기관을 받아들이고 있다. 박은식 역시삼국사기에서 발해사를 빼버린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었다. 박은식이 삼국사기에 반영된 김부식의 사대주의적인 역사인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음은 김유신과 연개소문에 대한 김부식과 반대되는 평가를 통해서 확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를 주창한 안재홍 역시 신채호나 박은식과 같이 삼국사기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묘청과 김부식을 비교하면서 묘청은 고구려 멸망 이래로 도도히 성장하는 당시 한화주의적 조류 속에 엄연히 자존적극파적 골두를 나타내어 남천 퇴영의 유극책을 배제하고 적전 천도의 북항정책으로 서경에 국가의 중심을 두어 칭제건원하는 해동천자의 구면목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자손 무궁의 복으로 외족 침략에 대한 적극 방략을 세우려다가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자로 설명하면서 이 싸움에서 김부식이 승리한 것에 대해 매우 애통해하였다.

 

다른 신민족주의자인 손진태는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적이며 귀족적인 성격의 관찬사서이고 삼국유사는 반사대주의적, 민족적인 입장을 지닌 사서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김부식과 대립한 묘청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역사가들과 차이점을 가진다. 1948년에 지은 국사대요에서 묘청일파를 미신당 이라고 불렀으며, 묘청 일파의 서경천도운동에 동조한 인종에 대해서도 어리석다고 일컬으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한 손진태는 삼국의 건국 기년을 인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국사기의 기년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반면, 동시에 그 기사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인정하였다.

 

안확은 주로 정치사나 정치제도에 초점을 두어 고대사를 연구하였으므로 삼국사기의 사실성이나 기년에 대해서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발해의 건국으로 조선이 남북 2국으로 분립되었다고 보거나 신라가 발해의 건국을 도왔다고 주장하는 등 삼국사기에 반영된 고대사상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삼국시대는 민족관념이 형성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신채호등이 오늘날과 같은 민족관념으로 삼국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 외에도 정인보는 신채호의 고대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의 기년을 수정 없이 받아들이고삼국사기의 기사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눈길을 끈다.

 

민족주의 사학자의 삼국사기인식의 한계

 

이처럼 대다수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김부식을 사대주의 역사가로 인식하였고 그의 저작인 삼국사기역시 김부식과 함께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로 평가절하 하였다. 물론 몇 몇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삼국사기에 전하는 기년이나 내용을 인정하고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신채호와 마찬가지로 김부식과삼국사기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사학자들의 삼국사기 매도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 들의 비판은 문헌비판과 합리성을 기초로 하여 도출된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대사를 재구성할 때에는 비합리적이거나 의심스러운 사료는 배제하고,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료들을 근거로 치밀한 문헌비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서 이러한 치밀한 문헌비판의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삼국사기에 중국에 대한 사대노예사상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삼국사기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권근을 비롯한 조선시대 역사서 편찬자들은 삼국사기에서 태후, 태자 등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사실을 근거로 들면서 오히려 삼국사기의 내용에 사대적 명분론에 어긋난 사실이 적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김부식 그 스스로 사대주의적 발언을 하였으나 문제는 과연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철저한 화이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모화론과 동일한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김부식의은 삼국사기의 사론에서 이상적인 대외관계에 대해 字小事大의 명분을 지켜 이웃 나라와의 선린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중국의 당 태종에 대한 기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당 태종을 전쟁광이라고 비난하였다. 만약 그가 모화론자였다면 이러한 기사를 서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채호는 김부식이 중국의 사적을 맹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역대 사서 동이열전의 주석을 편찬하는 심정으로 삼국사기를 지었다고 비난하였으나 삼국사기에서 세가가 아니라 본기의 체제를 선택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김부식이 철저하게 사대명분론을 준수하였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것이 사실이다. 또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불교나 고유 신앙에 대한 사료들을 신이사를 배격하는 관차원에서 참고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은 부분이 실렸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술이부작의 태도에 입각하여 삼국사기를 찬술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김부식이 유교사관에 입학하여 사료를 취사선택하고 자신의 임의대로 첨삭하였는가에 대한 문제 역시 확실한 물증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인식은 한계가 분명하지만 그들의 연구가 사학사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김부식과 함께삼국사기를 비판한 것은 삼국사기가 단순히 사대주의 역사서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중세적 명분론에 입각한 역사인식의 단초를 연 사서였을 뿐만 아니라 왕과 왕조 중심의 중세적 역사서술의 전범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이는 삼국사기에 대한 인식의 문제는 그들 개인의 문제가 시대의 문제이기도하다.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들, 역사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손진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근대적인 역사연구방법론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했으며 이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문헌검증에 부족하였었을 수 도 있다. 이 밖에도 신채호 등이 오랜 망명생활 때문에 한국측의 사료나 자료들을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측면, 당시는 상호비판이나 토룬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는 점도 그들의 삼국사기인식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나의 생각

 

내가 초등학교 때 가장 먼저 접한 역사 책이 [이야기 삼국사기]이었다. 삼국사기의 중요 기사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편집한 책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이 책 을 꼼꼼히 읽었고 초등학교 , 중학교 국사 시간에 큰 도움을 받았다. 대부분의 내용이 내가 읽은[이야기 삼국사기]와 유사하였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는 삼국사기 = 고대사역사서 그 자체 라는 인식이 깔리게 되었고 삼국사기 역시 사서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안 것은 고등학교 진한 후 였다. 내가 이러한 편견에 빠지게 된 이유로, 초중등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던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현재까지도 삼국사기가 일반인들에게 가장 대표적인 고대사 역사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을 들고 싶다. 이번 논문 요약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삼국사기는 무수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가 현재까지도 이러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이에 대해서 민족주의자들과는 다소 대치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정구복씨의 논문에 나타난 민족주의자들의 학문적 부족함과는 별도로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민족주의자들은 상당히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은 극도로 자주를 강주하고 사대와 타협의 자세를 부정적으로 비판하였는데, 물론 이는 시대적인 배경이 큰 몫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애국적인 자세는 인정하되 오늘날 이들을 학자로서 냉정하게 평가 하였을 때는 이들은 제대로 된 근대식 학문교육도 받지 못하였고 동시에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편향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들은 일제하에서 핍박 받고 있는 한민족을 위해 애국심 자주심을 불어 넣기 위해 의도적으로 삼국사기를 매도하였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 없다고 그 사람의 단점만 보기로 작정하고 본다면 장점이 보일 리가 만무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민족주의자들의 일방적인 비난을 좀 더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비난은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식민지 치하의 민족의 심정을 대변하는 감정적인 주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삼국사기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삼국사기를 재조명 했을 때 삼국사기는 훨씬 더 많은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삼국들의 역사서인 유기-신집, 사기, 국사 - 구삼국사 의 계보를 직,간접적으로 잇고 있다는 점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고 봐야 한다. 삼국사기와 계보가 닿아 있는 앞선 사서들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발견해낼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본래 개인의 저작물에 저자의 개인적인 성향이 반영 되는 것은 작가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 당연한 것이다. 후대인인 우리의 역할은 우리 앞에 놓여진 소중한 자료를 단순히 매도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세밀하게 활용할 방안연구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정통 고대사 사서인 삼국사기를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삼국사기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삼국사기에 대한 맹신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중요한 것이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게 될 우리 예비교사들의 자세일 것이다. 삼국사기에 대한 논란뿐만 아니라 다양한 대립각이 발생하는 여러 역사적 쟁점에 대해서 학생들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