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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위진남북조][수제국][당제국][동아시아 문화]동아시아의 재편과 수․당 제국 심층분석

by 9급일벌 2021. 1. 20.

-동아시아의 재편과 수당 제국 -

 

목차

 

1. 들어가기

2. 동아시아의 재편과 수당 제국

 

위진남북조 시대

1) 오호십육국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2) 북위의 의의

3) 북조의 호한 융합 정책

4) 호한문화 -유목민이 중국의 생활 문화를 바꾸다

5) ‘중화의 탄생

5) 남조 시대, 강남이 개발되다

6) 남조 시대 문화와 종교

 

수 제국

1) 수당제국의 창업자

2) 수의 짧은 통일이 큰 발자취를 남기다

3) , 대운하의 의미

 

당 제국

1)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의 탄생

2)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3)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도시, ‘장안의 봄

4) 페르시아 만에서 광주를 잇는 인도양 교역망의 발달

5)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

 

6) 안사의 난 이후 사회적 변화

 

3. 참고문헌

 

 

 


1. 들어가기

3세기에서 10세기. 이 시기의 특징은 유목민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점과 이전보다 아프로 유라시아의 교류가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이 시대를 바라보는 다음의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 “위진 시기에 일어난 민족이동은 격렬한 민족모순을 낳았고, 그 결과 호한간의 모순과 갈등은 심각했다. 이 속에서 공존을 위한 길이 모색되어 ‘호(胡)․한(漢)’은 상대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고 혈통적, 문화적, 제도적으로 서로 뒤섞였다. 그러므로 수․당제국부터는 진․한대처럼 한족 중심으로 중국사를 파악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이 과정을 단지 漢化라고만 일방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북아시아-중앙아시아를 처음부터 ‘오랑캐’로 깔보는 화이론적 편견을 버리고 거기에도 그 지역의 조건에 맞는 고도의 문명이 성립되어 발전하였고 이것이 중국, 한국 및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접근해야 그 다양성과 통합성 및 포용성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유용태, “다원적 세계사와 아시아, 그리고 동아시아사”, 󰡔환호 속의 경종󰡕

또한 이 시대에는 아프로․유라시아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육로뿐만 아니라 바닷길로도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교역망을 따라 여러 가지 물품들과 종교, 사상 등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관점을 견지하면서, 종래에 수․당의 성립과 지배자들의 정치적 업적을 중심으로 기록하던 서술 방식을 탈피하여 북방민족과 수․당 제국 성립 과정에서 나타난 영향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종교와 사상의 확산을 중심으로 활발해진 지역 간의 교류 양상은 불교를 중심으로 살펴보되, ‘서역과 동아시아에 퍼진 불교․불교문화’ 단원에서 별도로 다루었다. 
또한 당․송변혁기 사회 경제적 추이는  ‘송대’ 단원에서 서술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였다.


2. 동아시아의 재편과 수당 제국 

위진남북조 시대
1) 오호십육국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전통적인 한족의 관점에서는 오호십육국 시대를 야만적인 호족의 폭군이 속출한 무질서한 난세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호족과 한족의 대립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오호시대를 거치면서 호족과 한족은 스스로의 장단점과 한계를 인식했고, 이후 북조에서 호․한의 융합체제를 성립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로써 중국의 문화에도 활력을 불어넣은 역동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2) 북위의 의의
북위가 여타 오호제국과 달랐던 점은 호족국가의 최대 약점이었던 호한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데 주력했다는 점과 유목민 특유의 봉건적 질서를 배제하고 중국식 집권적 국가체제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선비족 고유의 부락제를 버리고 중국식 통치 원칙을 일부 채택하였고, 한족도 관리로 받아들여 정치적 기반을 다져갔다. 또한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아 윈강 석굴 같은 대규모 석굴사원을 만들기도 했다.                 
 
북위가 중국 역사에 기여한 또 다른 중요한 공헌은 전국 통일에 앞서 일련의 새로운 국가 제도를 설계하고 부분적으로 실천했다는 데 있다. 효문제는 495년에 성인을 대상으로 국가가 토지를 분배해 주는 균전제를 실시하였고, 496년에는 토지소유의 현황과 성별․연령별 호적을 작성하기 위해 삼장제(三長制)를 실시하였다. 그런 다음 균전제의 기초 위에서 ‘조용조’ 제도를 직접 챙겼다. 여기에 북위가 창조한 부병제 등이 더해져 일련의 국가 조직의 기본 틀이 잡혔다. 이러한 제도들은 향후 당 왕조에 의해 흡수․계승되었다. 


3) 북조의 호한 융합 정책
북위의 호한 융합 정책은 효문제 시기에 정점에 이르렀다. 뤄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효문제는 선비족의 풍속과 의복, 언어를 금지하고 성을 한족풍의 단성(單姓)으로 바꾸고 호한 사이의 통혼을 적극 장려하였다.                            
그러나 효문제가 漢化만을 추구한 한화론자라는 기존의 시각은 그 일면만을 보는 것이다. 외래문화에 대한 개방론자로서 보면, 서역의 것이든 남조의 것이든, 질적으로 우수하고, 필요하면 거부감 없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진취적 자세를 가졌던 황제였다. 경학․문학․제도 등의 일부를 남조에서 받아들였다고 하여 이것을 전적으로 남조화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효문제의 개혁 조치 이후 관료의 종족 성분을 분석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여전히 호족의 압도적 우위에는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북제와 북주 정권에서도 한족과 호족의 통합 작업은 중단되지 않았다. 서위의 실권자이며 북주를 세운 우문태는 한족의 성씨 체제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한족이 원할 경우 그들에게 호성을 사성(賜姓)해 주고, 그 경우 관직과 작위를 높여주고 봉읍을 대폭 하사하는 형식을 취하여 ‘호한의 친족화’에 동참하도록 적극 유도했을 뿐이다. 대규모의 호성 사성은 중국 역사상 단자성(單字姓) 체제를 붕괴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호성과 한성이 공존하는 성씨 체제를 정립시켰던 것이다. 현재 중국에는 5600여 개의 성이 있는데 단자성이 3480개, 복성(複姓)이 2030개, 삼자성이 240여 개 있다고 한다. 두 자 이상 성의 원류는 대개 이민족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4) 호한문화 -유목민이 중국의 생활 문화를 바꾸다
오호십육국 시대로 이어지면서 북중국에 목축이 농사와 함께 널리 퍼지자, 목축과 관련된 여러 생활 문화도 서서히 퍼져나갔다. 목축에 소보다 개가 더 중요하고 필요하게 되자 개고기를 먹는 한족의 풍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또한 유목민들이 즐겨 마시는 염소와 양의 젖이 널리 퍼지고, 요구르트, 버터, 치즈를 만드는 법도 전해졌다. 또 한족들도 양고기를 얇게 저며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양념장에 찍어 먹는 음식이나, 양고기 구이와 같은 유목민 음식을 즐겨먹기 시작했다.  
음식뿐 아니라 전통 의상에도 유목민의 옷차림이 유행하여 한족들도 소매나 품이 헐렁한 옷보다 몸에 꼭 붙는 옷을 입었다. 특히 여자들은 몸에 꼭 맞게 입어 곡선미를 강조하거나, 윗옷은 길게, 치마는 짧게 입기 시작했다. 이 밖에 윗옷에 덧입은 조끼, 유목민들이 말을 탈 때 신는 목이 긴 신발도 이 무렵 널리 유행했다. 
주거생활도 크게 바뀌었다. 유목민들은 의자나 침대 생활을 했는데, 북중국의 한족 사이에 이런 생활을 따라 하는 사람이 늘더니, 나중에는 양쯔강 남쪽까지 유행처럼 퍼졌다. 이 밖에도 유목민이 즐기던 음악․춤도 한족의 음악․춤과 섞이면서 중국 문화를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었다. 또 언어도 유목민 언어의 영향으로 새로운 단어가 생기고, 발음도 달라졌다. 말을 타는 일 등이 이 무렵부터 성행했다. 
이처럼 유목 민족과 한족의 문화는 한데 섞이며 차이를 점차 줄여 갔다. 그리고 두 문화는 오랜 기간에 걸쳐 모래에 물이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섞였다. 이렇게 유목민과 한족의 문화가 한데 섞이며 만들어진 문화를 ‘호한 문화’라고 한다. 호한 문화는 수와 당 시절에 다양한 문화가 꽃피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5) ‘중화’의 탄생
고대 중국인들은 자기들이 활동하고 있는 지역과 바깥 세계를 어떻게 구별하여 인식하고 있었을까? 학자들은 전통 시대 중국에는 민족 의식이 없었으며 중국인들은 서양의 자극을 받은 뒤 비로소 민족 의식에 눈뜨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중화주의’란 민족주의 그 자체는 아니다. 
중국인의 세계관은 ‘중국(中國)’이란 말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자체에 우월한 문명을 지닌 세계 중심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천하의 주인으로 여긴 고대 중국인들은 문명과 중심이라는 두 가지 잣대로 자기(華)와 주변(夷)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이것이 다름 아닌 ‘화이사상(華夷思想)’의 요체다. 
그러나 진한 제국의 등장으로 중국에 통일 왕조가 성립된 이후, 그 영토의 반 이상 또는 전체가 북방의 유목민에게 점령된 기간이 무려 700년 이상에 달했다. 특히 ‘야만’의 민족으로 치부해 온 오호족이 ‘문명’의 땅인 화북을 최초로 점령한 북조 시대 280여 년 간은 중국인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이처럼 화와 이의 위치가 뒤바뀐 시기에 ‘중화’라는 말이 처음 출현하였다. 이민족 출신 군주에 의해 ‘중화 군주’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던 것이다. 
흔히 이해하듯 중화사상은 화이사상과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화이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화이사상에 비해 중화사상이란 화이공존의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중화라는 용어의 출현이 격렬한 민족모순 속에 공존을 모색하던 위진남북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 점을 시사한다.                           

5) 남조 시대, 강남이 개발되다
남북조 이전의 강남 지역은 월족(越族)을 비롯한 소위 남만(南蠻)의 땅이었다. 이전의 왕조에서는 이 지역을 통치한다고 했지만 일부 거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통치자들의 마음 속에 그어 놓은 경계선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조의 성립을 계기로 이 지역의 산과 계곡에 살던 대부분의 종족들이 통치가 가능한 지역으로 끌려 내려와 편호화(編戶化)되었다. 이로써 강남 지역에 대한 점으로의 지배에서 면으로의 지배로 변화하는 단초가 열린 것이다. 후대에 풍요의 땅의 대명사가 된 강남은 사실 이 시대의 개발에서부터 잉태되기 시작했다.
모든 물자는 남경으로 모여들었다. 장강을 타고 사람과 물자를 싣고 온 선박도, 곡창 강남 지방으로부터 날라온 미곡도 모두 이곳에 모였다. 남경 남부를 관통하는 진회하(秦淮河)가 있는 오의항(烏衣巷)의 ‘왕사고거(王謝古居)’는 이런 풍요를 먹고 살았던 육조 귀족의 집단 거주지였다.            

6) 남조 시대 문화와 종교
중국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던 이 시대에 강남에서는 화려한 귀족문화가 꽃피었다. 귀족들은 정치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보다 세련되고 화려한 것을 중시하였다. 이에 따라 세속적인 것을 비판하고 인간의 본성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청담 사상이 유행하였지만 재주와 변론을 지나치게 과시하는 폐단도 나타났다. 
한편 이 시대에는 불교에 자극을 받아 토착종교인 도교가 나타났다. 후한 말의 태평도와 오두미도에서 종교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도교는 신선술과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청담사상과 불교의 교의를 받아들여 교단조직을 갖추었다.


고개지의 여사잠도(권) 부분. 장화가 궁녀들에게 어떻게 왕을 보필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글로 쓴 것을 고개지가 다시 그림으로 도해한 것이다.

미술 특히 회화가 단순히 교화․장식 등의 실용적인 면만이 아니고 인간 최고의 정신 생활의 하나로서 명확히 인식되었던 것은 남조에 와서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동진의 고개지이다. 그의 󰡔여사잠도권󰡕에서 보이는, 가늘게 면면히 이어진 선에 의해 묘사된 흘러내리는 듯한 옷을 걸친 유연한 여성상은 세련된 우아함을 보여주고 있다. 고개지의 작품이 그때까지의 회화와 전혀 다른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던 것은, 단순히 형태가 비슷해서만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장면의 정감이 긴밀한 공간 속에서 아주 사소한 표정과 몸짓으로 묘사되어 있는 점 때문이었다.  

수 제국
1) 수․당제국의 창업자
중국학자 진인각은 수․당제국의 창업자 및 창업 집단이 관(섬서성)․롱(감숙성)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일군의 정치 집단이었다는 ‘관롱 집단설’을 주장하였다. 관롱 집단의 창설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서위왕조의 실력자이자 북주 왕조의 실질적인 창업자인 우문태였다. 우문태는 지역적으로 관롱을 중심으로 하고, 종족적으로는 호와 한을 혼합하고, 능력 면에서는 무력과 재지를 겸수한 자들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냈다. 북주와 수나라는 물론 당나라 300년 간의 통치 계급의 변화도 이 관롱 집단의 흥쇠 그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의 건국자 이연의 집단은 농서 이씨로써 이연의 조부는 당시 8주국(우문태가 조직한 8인의 신귀족 대장군)의 일원이었고, 그 아들 이병은 8주국의 일인자인 독고신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이 여인이 이연의 모친이고, 수 문제 양견의 황후의 언니였다. 즉 이연과 양제는 이종사촌이었다. 또 이연의 처 두씨는 우문태의 외손녀였다. 따라서 당 왕실도 수 왕실처럼 북조계 문벌 귀족인 관롱 집단의 일원이었고, 호족이거나 아니면 호화된 한인 출신이었다.   


2) 수의 짧은 통일이 큰 발자취를 남기다
수의 역할은 8세기 전에 있었던 진(秦)의 그것과 흡사하였다. 왕조의 창업주는 제국을 재통일하였지만, 그의 후계자는 제국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였다. 수대의 통치자들은 진대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야심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너무나 짧은 시간 안에 너무나 많은 것을 성취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새로운 백성들에게 인내와 충성을 지나치게 강요하였다. 두 번째 황제 양제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이들 두 명의 수대 황제의 치하에서 위대한 제국 시대의 두 번째 문을 활짝 열었다.
수 왕조는 호․한의 융합적인 체제를 기본으로 하여 진한 제국의 집권적 지배체제와 남북조 이래 등장한 새로운 지배원리인 율령체제를 채택했다. 수대에 실시된 관료선발제도인 과거제, 토지제도와 수취체제, 병농일치적인 부병제, 3성6부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행정제도와 개편된 지방행정제도, 대운하 축조 등은 모두 당나라까지 이어지는 통일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적 기반이었다.  


3) 수, 대운하의 의미
611년 대운하가 완공됨으로써 중앙의 제국 정부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전까지는 정치적으로 우월한 북부와 경제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남부가 바다를 오가는 선박을 통해 연결되었는데, 그 선박들은 해적과 태풍의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운하가 개통됨으로써 양쯔강 하류 지역과 황허 유역 사이의 운송이 저렴해지고 안전해졌던 것이다.  이 운하는 곧 제국 경제의 대동맥이 되었다. 비옥한 남부 지방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운하를 통해 북쪽에 있던 제국의 수도로 운반될 수 있었기에, 막대한 물자를 소비하는 관료와 병사들이 수도에 머물 수 있었다. 대운하라 불리는 이 수로가 개통된 뒤, 양쯔강 유역 전체에 대한 통제가 엄격해지고 제국의 중심지에 대량의 물자를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과도한 노역은 백성들에게 재난처럼 여겨졌으니 6년 동안 공사에 동원된 인원만 550만 명, 공사 중에 죽거나 도망친 자가 2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건설 시초부터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운하는 산업용보다 위락용으로 쓰였고, 그것 때문에 양제의 업적은 크게 폄하되었다. 당대의 시인 피일휴는 ‘변화회고(汴河懷古)’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수의 황제가 탄 용주(龍舟)

수나라 망한 것이 이 운하 때문이라 할지라도
지금도 천 리나 그 물길 따라 파도를 헤쳐 가고 있으니
만약 수전(水殿)과 용주(龍舟)와 같은 것이 없었더라면
우 임금의 공과 같이 논해도 적고 많고를 따질 수 없으리니
                


당 제국
1)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의 탄생 
정관지치(貞觀之治 627년~649년)의 실제 업적은 대외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당초 대외적으로 수의 최대 적은 돌궐이었다. 당 태종이 즉위하자 돌궐과의 결전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돌궐에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 당조에 도움을 청한 것을 기회로 630년에 군대를 파견해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 당시까지 돌궐에 복속되었던 여러 부족이 계속 당조에 귀부했고, 여러 부족의 추장들은 태종에게 ‘탱그리카간(천하를 지배하는 칸)’이라는 칭호를 헌상했다. 이것은 당조가 호․한의 두 세계를 포함하게 되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북방의 여러 유목민 부족이 당조와 직접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뜻한다. 돌궐 이후에는 설연타가 강성해졌지만 태종은 여러 차례 토벌군을 파견해 646년에 이들도 평정했다.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중앙에서 도호를 파견해 감독시켰는데, 이것이 기미(羈縻)정책이었다. 기미란 소나 말 등의 재갈을 묶는다는 의미인데, 당조는 도호 밑에 정복지의 왕과 추장을 지방관으로 임명해 어느 정도 자치를 인정했다. 이로써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까지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남부까지, 남쪽으로는 인도차이나반도까지, 동쪽으로는 한반도 북부에까지 대제국이 건설되었다.                                          

2)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무후와 위후의 정권 장악을 후대의 역사가들은 ‘무위의 화’ 혹은 ‘여화(女禍)’라 불렀는데, 이것은 남존여비사상을 농후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주혁명의 의의는 문벌귀족을 대신해 신흥계층이 정계에 등장했다는 데 있다. 무후에서 현종 시기에 걸쳐 과거출신 관료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현종은 초년에 기강을 엄정히 바로잡아 농민생활에 안정을 주었고, 호구 수가 당대의 최절정인 약 900만 호에 이르러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다. 이를 개원의 치라 부른다. 이를 이룩한 것은 명재상으로 평판 높은 요숭과 송경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무후시대에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이다. 따라서 무주혁명의 성과는 현종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3)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도시, ‘장안’의 봄 
당대 장안은 한대 장안 분위기와는 달랐다. 살고 싶어 한대의 장안으로 찾아오는 외국인은 별로 없었다. 외국 사절도 한나라 조정이 주는 회사품을 챙겨 고국으로 돌아가기에 바빴다. 그러나 당대 장안 거리에는 불법 체류 외국인들이 그득했다. 당 왕조는 외국인에게 관대했다. 외국인 출신 공무원을 뽑는 과거인 ‘빈공과’를 두었던 나라가 바로 당나라였다. 외국인 가운데 장군으로 출세한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이들을 번장(蕃將)이라 했는데, 고선지 장군도, 양귀비를 사모했던 안녹산도 번장 출신이었다. 법률도 내․외국인에게 평등했다. 근대 서구 법 체계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속지법․속인법주의가 채택된 시대 또한 당대였다. 종교의 자유도 보장되어 마니교․경교․조로아스터교 등 소위 삼이교(三夷敎)가 민간에 크게 유행했다.


하서주랑(河西走廊)은 분열시대에 병마가 난립하던 곳이었는데, 장안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황금 노선으로 변모했다. 수리 시설이 잘 갖추어진 탓에 1,000리에 걸쳐 곡식이 자라고, 돈황에서 장안에 이르는 길에는 상업 도시들이 찬란한 진주 허리띠처럼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상인 행렬과 함께 낙타의 방울 소리가 시가를 울리면서 지나갔고, 북경과 통속적인 불교문학 작품들이 유행했다.         

             
장안의 동시와 서시는 당대 상업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반영한다. 동시는 황성과 흥경궁․대명궁 가까이에 있어 상류 사회의 관심을 많이 끌었다. 220가지가 넘는 상품을 판매하는 행상들이 즐비했다. 점포는 수만 가에 이르러 당시 세계초특급 시장구를 형성했다. 서시는 서역의 상인과 물건들이 특색 있었는데, 특히 서역의 무희인 호희(胡姬)들이 출연하는 술집이 가장 유명했다. 이 밖에도 진귀하고 이색적인 물품들이 눈을 어지럽게 했다.

돈황 막고굴 220굴의 호선무 장면 부분도
시인 위장(韋莊)은 “장안의 봄을 그 누군들 독점할 수 있으랴. 장안의 춘색은 본래 주인이 없는 것” 이라고 읊었다. 장안의 봄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음력 정월 장안에 봄기운이 돌더니 우수(雨水)가 되면 각종 꽃들이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고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황성문 앞에 쭉 뻗은 주작대로를 따라 세워진 작은 탑들 사이로 멀리 자은사 탑이 우뚝 솟아 있다. 탑 둘레에 불그레한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나절이 되면 장안성은 온통 상춘 인파로 출렁였는데, 새벽이 되어도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장안 사람들은 특히 모란을 사랑했다. 3월 15일 전후 모란이 피는 약 20일간의 장안은 꽃놀이꾼으로 시끌벅적했다. 모란이 마침내 지고 춘색이 사라져 갈 때 장안 시민들은 떨어진 모란과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날이 가는 줄 몰랐다. 사냥에서 금방 돌아온 귀공자도, 신라나 발해에서 온 유학생도, 낙타에서 막 내린 호인들도, 장안 서시에서 보석을 팔던 이란계의 아주머니도 그 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 
그들은 꽃 향기에 취해 술을 마셨다. 천재 시인 이백의 시에는 “웃으며 들어간다. 꽃 같은 호희(胡姬)가 기다리고 있는 술집으로”라는 구절이 있다. 당시 장안의 연흥문과 춘명문 주변은 이란계 호스티스가 손님을 맞는 술집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장안산 명주 외에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된 페르시아산 술도 인기를 끌었다. 그 술집에는 어김없이 소그드 출신의 댄서와 관현악을 연주하는, 곱슬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도 있었다.


4) 페르시아 만에서 광주를 잇는 인도양 교역망의 발달
8~9세기를 전후로 동서 문화 교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오아시스 루트의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고 바다의 실크로드라 불리는 해상 노선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정치 상황도 이러한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무측천 시기를 전후로 중앙아시아에서 당조의 영향력이 현저히 줄었다. 특히 현종 연간에 이르면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751)에서 대패했고, 몇 년 후에는 안사의 난이 발생하여 당조는 더 이상 중앙아시아 지역을 돌볼 수 없게 되었다. 7세기 이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한 티베트도 오아시스 루트의 교통 요충지인 돈황 일대를 정복함으로써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진입하는 길목을 가로막았다. 후에 안사의 난이 평정되지만 번진 세력들이 중앙 정부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반(半) 독립적인 성향을 보이는데, 이런 추세 속에 육상 루트는 점차 중요성을 상실해 갔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양쯔강 델타 유역을 중심으로 남중국의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한 것 역시 해상 루트가 교역의 중심 노선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대거 이민이 이루어지면서 양쯔강 델타 유역의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이렇게 경제적 규모와 패턴에 변화가 생김으로써 자연스레 교역량이 증가했다. 양쯔강 이남이라는 위치도 해상 루트를 이용하는 것을 훨씬 편리하게 했다.

이슬람 상선의 목적지였던 중국의 광주에는 이슬람 상인을 비롯한 외국 상인이 거주하는 대규모 거류지인 번방(蕃坊)이나 모스크가 만들어졌다. 번방 내에서는 완전한 자치가 보장되었고 중국 당국은 번방의 내정 간섭을 자제하였다. 고유의 의상을 입고 종교상 허용된 음식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이슬람 쪽 사료인 아부 자이드의 󰡔인도․지나 이야기󰡕는 당나라 말기에 황소의 군대가 광주를 점령할 때 유태인과 기독인을 포함한 아랍인 12만 명이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슬람 상인의 항로는 광주를 지나 중국 연해를 따라 북상한다. 푸젠성(福建省)의 취안저우(泉州), 양쯔강 하구의 상업 도시인 양저우(楊州)에도 거류지가 만들어졌다. 양저우는 이슬람 상인과 신라인이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였다. 양저우를 기점으로 중국-인도차이나-아랍제국으로 이어지는 남해무역은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교역권이었고, 북쪽의 중국-신라-일본의 교역권은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신라 해상세력이 장악하였다. 양저우에는 아랍 상인들의 번방과 신라인들의 신라소가 이웃해 있었고 아랍 상인들을 통해 신라에 관한 정보가 아랍 세계에 알려졌다. 


5)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
당의 영토가 확대되면서 동아시아 각국이 당과 정치․군사 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기미정책에 의한 책봉체제를 통해 긴밀한 문화관계도 맺게 되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4대 기본 요소가 되는 유교와 불교 및 율령제와 한자가 당대에 이르러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 특히 한자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본 전달 수단이 되어 국제적인 문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시작된 유교는 동아시아 각국의 통치 이념과 사회 윤리 사상으로 정착되었다. 율령체제는 황제를 정점으로 한 관료적 지배체제로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정치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서역을 거쳐 중국에 유입되고 주변 여러 나라에 전파되어 동아시아 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불교는 단지 종교로서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건축․조각․미술 등 문화 전반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6) 안사의 난 이후 사회적 변화
중앙집권적 통치를 실시할 수 없었던 당나라는 3분의 1로 줄어든 인구와 그에 따른 조세수입의 보완을 위해 780년 양세법을 실시하였다. 양세법은 토지소유의 제한을 없애고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함과 동시에, 기존의 잡다한 세금을 통합하여 자산에 따라 동전액을 기준으로 1년에 두 차례 세금을 부과하는 세제였다.
양세법을 실시하여도 늘어가는 재정 부담 때문에 당나라는 소금을 전매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생산원가의 10배 정도의 세금을 매겨 국가가 생산과 출하를 감독하고 상인이 유통과 판매를 담당하는 형식이었다. 이후 차에 대해서도 전매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재정이 악화될 때마다 소금 가격을 인상시켜 소금 가격이 생산원가의 30배까지 치솟자 밀매염을 파는 염적(鹽賊)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점차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무장하여 국가의 단속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당조를 붕괴로 몰고 간 황소 역시 염적으로서 그 조직망을 이용해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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