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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고대 일본의 역사][고분시대][아스카 시대][나라 시대][헤이안 시대][일본 천황제]고대 일본 역사 심층분석

by 9급일벌 2021. 1. 20.

 

목차

 

1. 들어가기

2. 고대 일본의 역사

 

일본 고대사 연표 (3세기~10세기)

 

소국(小國)의 성립과 야마타이국

 

고분 시대

1) 고대 국가 체제로 나아가는 야마토 정권

2) 왜국으로 건너온 사람들 (도래인)

 

아스카 시대 (592~710)

1) 쇼토쿠 태자 시대의 내정과 외교

2) 아스카 문화

3) 한반도와 왜국의 교류, 그 배경

 

나라 시대 (710~794)

1) 나라 시대 전후 율령국가의 성립 과정과 일본’, ‘천황의 등장

2) 나라시대 불교의 역할

3) 국제적 귀족적 성격을 띤 하쿠호 덴표 문화

4) 중앙 집권 국가의 급속한 동요

 

헤이안 시대 (794~1193)

1) 중앙 집권 국가의 와해

2) 국풍 문화의 성립과 발전 (10세기~12세기. 일명 후지와라 문화)

3) 불교의 주술화(신불습합)

 

일본에서 천황제가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신도

 

3. 참고문헌

 

 

 

 

1. 들어가기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일본, 지금도 역사를 둘러싼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나라, 정작 교과서 속에 일본은 어떻게 서술되어 왔을까? 󰡔국사󰡕교과서에 서술된 고대 일본은 동아시아 주변에 위치하여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문화를 수용하기만 한 나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고대 삼국이 일본에 전해준 유물유적에만 비중을 크게 두고 있는 형편이다. 󰡔세계사󰡕 서술에서도 10세기 이전의 일본은 그저 동아시아 주변의 한 나라 정도로만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런 서술 방식으로는 일례로 동아시아에서 치열한 국제 외교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일본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단원에서는 3세기에서 10세기에 걸친 일본의 역사를 다음에 주목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국에서 일본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일본이 중국 및 한국과 어떤 관계를 형성해왔는지를 살펴보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 요소 중 불교와 율령을 중심으로 일본은 이를 어떻게 수용했는지, 그것이 이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다루도록 하겠다.

특히 이 시기에 고대 일본에서 중앙집권 국가의 강화가 어떤 시도에서 이루어지며, 어떻게 와해되어 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 속에서 천황은 어떻게 등장하고, 어떻게 위치지워져 갔는지, 일본의 신도는 외래 종교와 어떻게 영향을 미치면서 일본 속에 남아 있는지 에 주목하고자 한다.

 

 

2. 고대 일본의 역사

 

일본 고대사 연표 (3세기~10세기)

시기

B.C 3세기

~A.D 3세기

3세기 말~7세기

592~710

710~794

794~1193

시대

구분

야요이 시대

고분 시대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특징

 

왕권강화를 위한 첫걸음

왕권국가의 기틀 마련

왕권 국가의 동요

왕권 국가의 와해

미술사

 

 

아스카 문화

-645년 다이카 개신 전후-

하쿠호 문화

덴표 문화

국풍 문화

 

소국(小國)의 성립과 야마타이국

삼국지 󰡔위지왜인전󰡕에 따르면, 2세기 후반 소국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야마타이국의 히미꼬를 소국을 대표하는 왜국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전쟁은 수습되었다. 그녀는 신을 접하는 무녀, 샤먼이기도 했는데, 국제 감각도 뛰어나 위()가 한반도의 공손씨를 멸한 이듬해인 239, 위나라에 사자를 보내 친위왜왕(親魏倭王)의 칭호를 얻었다. 󰡔위지왜인전󰡕을 보면 왜의 각국에는 왕과 관인이 있었으며 이들 각국을 엄격하게 감독하는 관인도 있었다. 세를 징수하며 법을 어기면 처벌했다. 시장까지 열렸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본격적인 국가 구조에 가깝다. 야마타이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특히 큐우슈우설키나이(畿內, 나라현)설이 유력하다. 유적유물로부터 추구하는 고고학의 연구자 중에는 키나이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고분 시대

1) 고대 국가 체제로 나아가는 야마토 정권

일본에서는 3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를 고분시대라고 한다. 무덤을 만들고 묻는 방식이 이 시기의 성격을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3~4세기에는 둥근꼴, 네모꼴 등 다양한 무덤을 만들었는데 구리거울, 옥제품, 칼 등이 껴묻혀있다. 이로 미루어 무덤 주인공은 주로 제사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에는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졌다. 전방후원분은 홋카이도와 혼슈 북부지방,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오사카 다이센 고분은 무덤 자체를 만드는 데 매일 1000명 정도가 동원되어 4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고분이 기나이 지방을 중심으로 동서로 퍼져간다는 사실은 기나이의 야마토 지방에서 생겨난 어느 작은 나라의 이 일본 전체의 대왕이 되어 그 지배력을 관동지방에서 규슈까지 확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후기인 6,7세기에는 전방후원분이 쇠퇴하고 점차 돌방무덤으로 변했다. 이는 왜 왕권이 확실하게 확립되어 더는 거대한 무덤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불교가 들어오자 사원이 권력을 과시하는 대상으로 변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야마토 정권이 점점 더 중앙집권적 고대 관료 국가의 체제를 갖추어 가는데 유력한 원동력은 바로 지배자들의 적극적인 대륙 문화 수입이었다. 중국 육조 시대의 공예품과 그 기술로 만들어진 스에키 등의 물질문화 영역, 한반도 도래인을 통해 전해진 한자나 음양천문유학 경전불교의 불상 등의 정신문화 영역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대륙문화의 섭취가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3) 왜국으로 건너온 사람들 (도래인)

3세기 후반에서 7세기까지의 고분 시대에 한반도에서 왜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도래인이라고 부른다. 도래인이 일본에 건너온 시기는 4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전설의 시대로, 도래인이 처음으로 건너온 시기다. 2기는 5세기로, 전설의 시대 이후 새롭게 도래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기술(예컨대 토기 만드는 기술 등)을 왜국에 전했다. 3기는 6세기로, 유교와 불교를 전해서 아스카 문화의 기초를 만들었다. 4기는 7세기 후반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해 다른 시기보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가 왜국의 정치와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9세기 초에 편찬된 책에 따르면, 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1065개 성씨 가운데 326개 성씨(30%)가 가야백제고구려신라에서 온 도래인이었다.

 

아스카 시대 (592~710)

1) 쇼토쿠 태자 시대의 내정과 외교

쇼토쿠 태자는 593년에 섭정을 시작하여 622년에 서거할 때까지 약 30년간 일본 고대사의 기틀을 확립했다. 쇼토쿠 태자는 603관위 12(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 지위를 정하고 관을 수여하는 제도), 이듬해에는 ‘17조 헌법(호족들에게 내리는 정치적도덕적 훈계 형식을 띤 강령)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호족을 관료로 조직화하여 대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그때까지 백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외교관계에서 더 나아가 고구려, 신라와의 관계도 한층 강화했으며, 5세기 이래 중단된 중국과 직접 문물 교류에도 나섰다. 견수사(遣隋使)를 다섯 차례 파견하여 중국의 제도, 법률, 학문, 기술 등을 배워 오도록 한 것이다. 607년 에 파견된 견수사가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국서를 보내니 별일 없는지라는 내용의 국서를 전해 수양제의 격노를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태자는 중국을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를 펴면서 대등한 관계를 지향하였다. 이 때 견수사 가운데 일부는 후일 다이카 개신으로 시작되는 국정 개혁의 주역으로 신 정권의 국정에 큰 역할을 했다.

 

 

2) 아스카 문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중반 무렵까지 정치 중심지였던 야마토 남부의 아스카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꽃핀 문화를 아스카 문화라 한다. 아스카 문화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먼저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라는 사실과 페르시아, 중국 등의 문화의 영향을 들어 국제성을 그 특색으로 지적한다. 하지만 불교문화만이 아스카 문화를 장식한 것은 아니며, 유교 혹은 도교 신앙도 도입되었다. 또 그 국제성에 있어 고구려백제신라 등 한반도의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또한 이 시대에는 삼국시대의 음악과 춤기악 등도 전래됐으며, 오경박사를 비롯한 유교의 관계자도 도래하여 학문과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교단도교는 물론 도교신앙도 전해졌다. 602년 백제에서 관륵이 도래해 방술서를 전했으며, 611년 경부터 궁중에서는 도교신앙과 관계 깊은 약초 채취가 연중행사가 되었다. 최근에는 야마토 아스카의 여러 곳에서 원지(園池) 유구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연못 가운데 섬 모양으로 쌓은 도상석 더미라든지, 나라현 아스카촌의 주선석 유적의 거북모양의 돌은 봉래산을 거북이가 떠받고 있는 도교적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3) 한반도와 왜국의 교류, 그 배경

일본의 불교 공전(公傳)’ 연도에 대해서는 538년과 552년 두 가지 설이 있다. 538년은 백제가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면서 재건을 꾀했던 때이고, 552년은 백제가 한산성을 탈환했지만 신라에 다시 빼앗긴 해로서, 554년에는 성왕이 전사하였다. 어느 쪽이든지 백제가 왜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행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일본 최초의 사찰인 법흥사(아스카지) 건립에 백제와 함께 고구려의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부분이다. 이 절이 고구려의 사찰 건축 양식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고구려 승려 혜자가 쇼토쿠 태자의 불교 스승 역할을 했다는 점 등이 그것인데, 백제와 격렬하게 대립하고, 왜와도 대립하고 있었던 고구려가 왜에 접근하려고 애썼던 이유 역시 한반도의 정세와 관련이 있다. 고구려가 왜에 사신을 보낸 570년 이후 한반도는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과 이후 수의 중국통일이라는 정세에 놓이게 되는데 고구려는 이 같은 정세 속에서 왜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645, 당이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삼국의 공방이 격렬해지고 있었던 때 왜국에서는 이른바 다이카 개신이 단행되었다. 전통적으로 왜는 친백제 정책을 외교의 기조로 삼았지만 개신 정부는 646년 신라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당 및 신라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노선으로 기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왜국 내부에서는 외교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있었으며 고토쿠 천황 사망 이후 급속히 백제 쪽으로 외교 노선이 기울게 된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함락된 후 전개된 백촌강 전투에서 왜국은 크게 패하게 된다. 668년에 즉위한 덴지 천황은 백촌강 전투의 패배로 인해 조성된 긴장 속에서 국가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오미령과 경오년적(호적)을 작성한다. 이후 당과 신라와의 전투가 시작되고 왜국은 위기에서 벗어나는 형국이 되고, 이후 견당사가 파견되고, 신라와의 관계도 회복돼갔다.

 

삼국시대 동아시아에서는 치열한 국제 외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이 외교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역이었음을 감안해야 삼국과 일본의 문화교류를 이해할 수 있다. 일본으로의 문화 전수는 결코 무료 봉사가 아니었으며 정치적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한 경쟁이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와 발해가 일본과 교류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중국, 신라와 국경을 맞댄 발해는 북쪽의 돌궐, 남쪽의 일본과 가까이 지내며 대항 세력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는 언제나 서로 주고받는 쌍방관계였다.

 

 

나라 시대 (710~794)

1) 나라 시대 전후 율령국가의 성립 과정과 일본’, ‘천황의 등장

동아시아 제국에 있어 격동의 시대였던 7세기, 왜국도 6세기 이전의 부민제와 씨성제에 기초한 옛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한다. 일본의 율령국가는 천황을 세습적 군주로 하는 군주제 국가로, 공민제(公民制,율령제 아래에서 과역을 부담하는 일반백성인 공민으로 편성된 사회조직)와 관료제를 그 축으로 삼았다. 671임신의 난이후 즉위한 덴무 천황 시대에 일본의 율령체제는 급속히 정비되었으며 이후 호적반전제도(호적에 등재된 만 6세 이상의 백성들에게 일정한 토지를 나눠주어 경작하게 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천황통치의 역사적신화적 정통성을 확보할 목적으로, 후의 󰡔고사기󰡕󰡔일본서기󰡕로 연결되는 帝記, 舊辭의 정리사업도 개시되었다. 또 최초의 동전인 부본전의 주조도 이루어져 일본의 율령국가는 이 덴무, 지토 양조를 통해 거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701년에는 타이호오율령이 제정시행되었다. 다음해 견당사가 부활되었으며, ‘일본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들어 대왕을 대신하여 신격화된 천황이라는 칭호가 쓰이기 시작했다. 법식을 갖춘 소제국의 성립을 선언한 것이다.

나라 시대에는 앞서 제정되어 시행된 타이호오 율령을 수정정비하는 시기였다. 율령 국가는 당의 장안을 모방했다는 헤이죠오쿄(평성경)의 조영을 거쳐 큰 발전을 이루었다. 712년 에미시의 땅이었던 동북지방과 큐우수우 남부까지 일본의 고대국가의 영역이 확립되었으며, 이들 지역을 둘러싼 역로(驛路)와 전로(傳路)를 따라 국부(國府)를 매개로 중앙의 도성과 연결되었다. 또한 관개시설의 건설과 경지의 개발 등 산업기반을 정비하는 등 율령국가의 위세를 드러내는 데 힘썼다.

 

2) 나라시대 불교의 역할

불교는 일본에서 해탈의 가르침으로서가 아니라 재앙을 막아주고 복을 가져다주는 주술로 전파되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신사 신앙과 불교 신앙이 양립되었다. 불교는 처음에는 소가 씨 등 호족 사이에서 사적으로 신앙되었으나, 다이카 개신의 전후 무렵에는 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신앙되고 사원이 조영되기 시작했다. 도다이지(東大寺) 및 각 국마다 건립된 고쿠분지(國分寺)의 건립이 그것이다. 이러한 조정의 적극적인 불교 신앙은 진호국가(鎭護國家)’, 곧 국가를 수호하려는 바람을 전적으로 불교에서 구하고자 했던 결과 때문이었다. 따라서 불교 본래의 사명인 바른 깨달음의 길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3) 국제적귀족적 성격을 띤 하쿠호덴표 문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의 하쿠호 문화와 비교해 나라시대의 문화를 그 중심이 되는 소오무조의 연호를 따서 덴표 문화라고 부른다. 아스카문화가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화를 기반으로 형성했음에 비해, 하쿠호 문화와 덴표 문화의 특색은 對隋對唐 외교의 전개를 통해 수당으로부터 중국문화를 직접 수용하여 형성된 데에 있다. 당 문화의 섭취를 통해 형성된 문화이기 때문에 인도페르시아동남아시아 등 광범위한 지역의 문화를 유입하여 국제적인 색채가 대단히 풍부했다. 예를 들어 하쿠호 미술을 대표하는 호류지 금당벽화에는 인도의 아잔타 벽화의 양식이 유입되었다.

국제성과 함께 하쿠호덴표 각 문화에 나타난 하나의 공통된 특색은 귀족적 성격이다. 경제적 부와 외래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지배층은 당풍의 저택과 사원이 나란히 줄지은 도성, 정교한 미술공예 등으로 상징되는 귀족성이 풍부한 문화를 창출하였다.

통일국가의 형성은 한편으로 민족적 자각도 촉구했다. 고유문화가 외래문화의 수용과 영향 아래 독자적 발전을 수행한 것도 이 시대 문화의 한 특색이다. 예를 들어 신기(神祇)제사의 의례도 정돈되었고, 신사 건축도 사원 건축의 영향을 받아 발달했다. 또 한문과 한시는 귀족과 지식계급의 교양이었으며, ‘만요슈(萬葉集)’로 대표되는 뛰어난 와까(和歌)문학을 낳았다. 여기에는 일반민중의 노래도 많이 포함되어 당시 일본인의 생활과 감정에 접할 수 있는 좋은 사료이다.

 

4) 중앙 집권 국가의 급속한 동요

중앙 집권 제도를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나라 시대에 이미 율령제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인 국가 토지 소유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743년 국가는 인구 증가 등으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자, 이를 타개하고자 개간한 토지에 대해 영구 사유를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장원이 등장하고, 국가 세역의 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장원으로 도망가는 일이 속출하면서 공지공민(公地公民)이 동요하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또한 지배층 내부에서도 정쟁이 끊이질 않았다. 일본의 왕권 국가는 야마토 정권 이래의 세습적이고 귀족적인 모습을 강하게 유지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래서 막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출발하는 시점부터 권력을 둘러싼 귀족의 투쟁으로 흔들렸다. 천황권은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피비린내 나는 정쟁 가운데 후지와라 씨는 다른 귀족을 압도하고 강력한 귀족으로 성장해 나갔다.

정국이 불안정하고 질병기근전란이 겹치자 쇼무(聖武) 천황은 부처의 힘을 빌려 사회 동요를 막아보고자 도다이지와 대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정국의 불안은 더해갔다.

귀족 세력의 힘이 왕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대했으며, 외부의 위협이 없는 상태에서는 왕권 강화를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를 수립하고자 한 급격하고 짧은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 열도는 망망대해 남태평양의 섬들과 달리 대륙과 적당한 거리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선진 문화의 자극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바다라는 장벽으로 인해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거의 없었기에 한국처럼 필사적으로 대륙 문물 수용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일본은 자신의 환경에 따라 적합한 부분만 취사선택했다. 사상과 종교도 한국처럼 본질과 정수를 이해하지 않고 필요한 것만 선택했다. 이것의 연장선에서 왕권 강화도 이해해야 한다. 왕권 강화를 쉽게 포기한 것도 섬나라라는 일본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왕권 강화의 실태는 일본이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이탈하여 독특한 문화를 갖게 되는 기본 배경이 되었다. 이렇게 나라 시대에 왕권 국가를 위한 최초이자 최후의 시도가 무너지면서,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캄무 천황은 명문 귀족이나 사원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흔들리는 정치 체제를 쇄신하고자 794년 수도를 나라에서 헤이안(平安京, 현 교토시)으로 옮겼다.

 

 

헤이안 시대 (794~1193)

1) 중앙 집권 국가의 와해

헤이안으로 수도를 옮긴 캄무 천황은 여러 가지 개혁 조치를 취했지만 율령제가 해체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편 중앙정부 내부에서는 관료정치가 무력화되고, 후지와라 씨가 셋쇼(攝政, 천황이 어릴 때 정무를 대행함)와 칸바쿠(關白, 천황이 성인이 된 후에 후견인 역할을 함)를 담당하며 사실상 군주와 대등한 지위를 세습하는 관례를 만들었다. 이로써 경쟁적 지위에 있던 다른 귀족을 억압하여 후지와라 독재라는 귀족정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969년 이후 천황은 이름뿐이었으며 150년에 가까운 시기 동안 셋칸(攝關) 정치가 이루어졌다. 이후 후지와라와 외척관계가 전혀 없는 천황이 즉위하지만 그 역시 황위를 양위하고 자신은 상황이 되어 정치를 실시하는 원정(院政)이 이후 100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원정은 중앙집권 국가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고 실제 내용은 섭관가의 귀족 정치 시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심지어 상황과 천황 사이에 세력 분쟁이 자주 일어났고 내란으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중앙 정부가 그 능력을 상실해가면서 지방 유력자들은 자신의 생명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는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사무라이는 왕권 국가가 실패한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2) 국풍 문화의 성립과 발전 (10세기~12세기. 일명 후지와라 문화)

정치가 쇠퇴한 후지와라 시기에 문화는 대단한 번영을 누렸다. 중국 문화의 표본을 따르면서도 일본 고대 요소와 자연스럽게 융합시켜 일본적인 문화 -국풍 문화가 성립하고 발전한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명쾌한 사례가 벚꽃과 매화에 대한 관념의 변화이다. 󰡔만요슈󰡕에는 중국이 원산지인 매화를 읊은 노래가 압도적으로 많다. 7~8세기의 귀족들이 매화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에는 이것이 역전된다. 󰡔고킨와까슈󰡕(古今和歌集[905], 최초의 와까집)에는 벚꽃을 소재로 한 노래가 매화를 소재로 한 노래보다 많다.

 

헤이안 초기는 당풍을 구가하던 시기였는데, 그러한 한문학이 국풍문화와 문학을 육성했다. 카나(假名)도 한자의 습득이 전제가 되고 있지만, 카나의 보급이 와까(和歌)를 재생시켰다. 이 시대에는 일본적인 궁전 건물 양식이 만들어졌고, 그림도 일본의 풍경이나 풍속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화풍도 일본풍으로 되어 일본화의 원류인 야마토에(大和繪)가 발달했다. 헤이안 중기 11세기 초 쯤에는 󰡔겐지모노가타리󰡕 등 일본적인 정취와 사랑을 작품의 주제로 쓴 가나 시집도 쓰여졌다.

 

부정(不淨, 케가레)이나 원령(怨靈) 등의 관념도 같은 시기에 증폭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역시 국풍 문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지옥에 떨어진다는 공포 때문에 9세기 후반에 정토왕생이 왕권을 중심으로 침투했으며, 10세기 후반에는 염불이 귀족과 도시민의 일상 생활에 정착한다.

 

3) 불교의 주술화(신불습합)

불교는 일본 열도의 독특한 환경에 적응하였다. 당에 유학한 승려에 의해 창시된 천태종과 진언종은 새로운 국가 불교로 발전한 헤이안 시대의 대표적인 불교이다. 이들 종파는 모두 귀족을 후원자로 삼았다. 진언종은 처음부터 독특한 주술과 기도를 주도했다. 천태종도 원래 법화경을 신봉하는 형이상학적인 종파였는데, 머지않아 주술과 기도를 주로 하는 밀교가 되었다. 또한 더러운 현세를 싫어하고 죽은 뒤 극락정토에 갈 것을 기원한다는 흔구정토사상(欣求淨土思想)이 민간 포교자에 의해 설파되었다. 최상급 귀족이 주로 흔구정토사상을 받아들였지만, 이들 귀족은 정토사상을 신앙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토사상을 하나의 미학적 수단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보됴인의 봉황당처럼 귀족들은 화려한 아미타당을 짓고 그곳을 별장으로 삼았다. 그 안에는 금빛 찬란한 아미타여래상을 안치하고, 주위의 벽과 문에는 극락의 광경을 그려 넣고, 미모와 미성을 겸비한 승려들이 경문을 합창토록 했다. 그 가운데에서 극락정토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일본의 신도 속으로 포섭되어 일본화하였다. 이것을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 한다. 신불습합은 더욱 진행되어 10세기, 헤이안 시대 중기에는 일본의 신과 부처를 직접 관련짓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設)이 나오게 되었다. 부처는 근본 실체(본지)이며, 신도의 신들은 부처의 화신(수적)이라는 설이다. 이리하여 모든 신도의 신은 보편적인 불교신의 지방적 표현이라는 정교한 체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주요 일본의 신에 각각의 본지불도 정해졌다. 천황의 조상신 아마테라스 오마카미는 최고 부처인 비로자나불이 본지불로 정해졌으며, 이세의 신은 대일여래를 본지불로 삼았다. 본지수적설은 신도가 강한 일본의 풍토 속에서 불교가 생존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었다.

 

일본에서 천황제가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역사의 초창기에 정치 지도자는 주술적 의례를 잘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다. 2세기 말, 왜의 히미코 여왕도 주술적 능력 때문에 소국 대란을 수습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4세기 일본에 등장하는 야마토 정권의 대왕은 수많은 우지의 제사장이었다. 대왕의 권위는 군사력에 의해 유지된 것이 아니라 우월한 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제사지낼 수 있는 후손이라는 혈통에 의해 보장받았다. 이후 일본의 중앙 집권 체제가 급속히 무너져 내리면서 왕권 강화 실패의 결과 천황은 세속적인 정치 권력자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많은 일본의 신 가운데 최고의 신에게 제사지낼 수 있는 주술적 제사장으로 남게 되었다. 이처럼 최초의 국가 수장, 제정일치의 왕이라는 개념은 일본의 천황을 이해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전제이다.

 

일본에서 천황제가 무너지지 않고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우선 일본 사회에서 원시 신앙, 즉 신도가 매우 강한 전통으로 존속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원시 신앙이 사회 곳곳에 살아 있는 사회라면 정치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강인한 신도의 존속은 종교적 군주, 천황이 살아남을 수 있는 큰 배경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일본이 열도라는 점이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이민족의 침입에서 자유로운 열도라는 지리적 환경이 최초의 국가 수장 천황이 다른 지역과 달리 존속하게 된 전제가 된 것이다.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신도

불교 수용 이전부터 일본은 바다, , 바람, 천둥 등이나 지역의 토지신과 조상신을 가미()로서 숭배했다. 이처럼 자연 현상, 동식물, 조상신 등의 신령한 힘을 경배하며 의례를 통해 재앙을 물리치는 원시 신앙에 가까운 것이 신도이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수많은 신 가운데 씨족의 수호신(조상신)과 토지신이 중시되었다. 신앙은 모든 공동생활의 중심에 있었고, 신에 대한 제사는 가장 중요했다.

 

신도의 가미() 신앙은 도덕적인 선악에 구애받지 않으며, 현세 이익을 중심으로 한다. 신도의 가치관은 집단적인 가치로서, 집단이 인정하는 선악과 도덕이지 집단의 모순에 맞서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초월하는 원리가 거의 나오지 않으며, 집단을 넘어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 가치, 절대 가치가 결여되었다.

천황제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신도가 오랫동안 끈질기게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중국이나 한국 등에서 왕권 강화와 함께 불교유교가 철학 사상과 통치 원리로서 발달된 것과는 달리 일본은 왕권 강화에 실패하여 중앙 집권이 발달하기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나 불교 같은 보편 철학이 발전하지 못하고 원시 신앙이 강하게 온존하였다. 또 자연환경, 즉 화산지진태풍과 같은 일본의 거친 풍토와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추론한다. 귀중한 모든 것을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절박한 환경에서 인간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위안을 주는, 기복적인 신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셀 수 없이 많은 신이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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